8. 감정

by 가끔은

무슨 동네 반상회도 아니고 지금까지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모든 감정이 쓰나미처럼 흘러나왔다. 이게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전 기억을 떠 올리고 나면 항상 이건 뭘까, 하는 복잡한, 마치 바닥에 가라앉은 흙탕물을 휘저어놓은 뿌연 답답함이 한참을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무이와의 대화에서는 오히려 점점 더 맑아지고, 분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다 그런가요? 말을 하고 나면 시원해지는? 아니면 더 맑아지는 기분을 처음 느껴보았어요. 정말 군더더기 없는 대화라는 걸 할 수 있게 된 이 순간이 감사하게까지 느껴지네요. 고마워요.”

알 수 없는 개운함에 일단 난 이무이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이종이 씨는 제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이야기를 하신 거죠. 감사인사는 저에게는 큰 의미가 없지만, 진심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감히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이무이가 한결같은 무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처음부터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려웠던 건 아니에요. 어릴 적 이야기는 솔직히 크게 슬픔이 머물러 있진 않아요. 평소에는 스쳐도 아무렇지 않은 흉터가 눈으로 보면서 그 순간을 기억하며 만지면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정도? 그냥 멀리멀리 가 있는 소음을 바라보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분별은 되지만, 느껴진다고 하기엔 너무 옅어요. 하지만, 무언가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 속에서 그런 감정들이 다시 내 바로 옆에서 발현되는 경우가 생겨요. 이건 뭘까요?”

나는 내가 이런 생각을 입밖에 내는 모습이 너무 신기했지만, 순간 기특한 마음도 들었다. 나도 이렇게 표현이란 걸 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안도감이랄까?

“이런 감정들은 끝나지 않았다의 의미는 아닙니다. 동행의 의미를 아시나요? 이러한 감정들은 계속 종이님의 일부로 존재하며, 함께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좋겠네요. 정리가 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냥 같이 살아가고 있는 그 어떤 오래된 친구 같다고 생각해 보세요. 솔직히 슬픔이라는 감정은 ‘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가고 있지만, 매번 늘 존재를 보이진 않죠, 한 번씩 나 여기 있어,라고 안부인사 전하듯 나타나는 것뿐이고, 종이님은 그렇게 함께 그 감정과 동행하는 방법을 인지하고 배워나가는 중인 것이지요.”

이무이는 대답했다.

“이렇게 말로 꺼내보는 게 처음이라..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겠네요.”

여전히 혼란스러운 나는 대답했다.

“이제 시작입니다. 감정이라는 건 보통 아주 불친절하게 포장이 되어있습니다. 꺼내봐도 내용물이 뭔지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내용물이 적혀있지 않는 이삿짐 박스를 하나씩 열어보는 겁니다. 뭘 꺼낼지도 모르고, 어디에 둬야 할지도 모르고, 버릴 건지 간직할 건지도 모르는 상태지요. 하지만 이종이 님, 지금 꺼내고 있죠. 그게 대단한 겁니다. 뭘 원하는지도 모르겠다고 하셨지요? 일단 말로 풀어내세요. 스스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야기를 하면 시원하고 맑아지는 느낌을 받으셨다고, 잘하고 계셔요.”

이무이가 단숨에 대답했다. 기분 탓인지 이무이의 표정에도 변화가 생긴 듯 보였다.

“이 짧은 대화에서도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이렇게 후련하고 기분 좋은 경험이라는 것이 느껴지네요, 왜 저는 진작 이야기를 하려고 들지 않았을까요?”

“말에 힘이 있다는 이야기 들어보셨죠? 말은 감정을 ‘현실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있을 땐 흐릿하지만 반쯤 꿈, 반쯤은 망상 같아서 어쩌면 아닌 척하면서 살아갈 수 있지요. 하지만 말로 꺼내는 순간, 그 감정은 이름이 생기고, 형체가 생기고, 무려 다시 살아 움직이며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거죠. 또한 이야기를 꺼낸다는 건 자기를 노출하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그건 곧 자기를 방어 없이 드러내는 것이고,,, 단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한 후에 외면당하는 것. 이것 때문에 꺼내기가 두려워지는 것이지요. 받아줄 사람이 없다면 이 감정은 더 원초적으로 민낯을 드러낼 테니까요…”

이무이의 말을 듣고 나서 나에 대해, 나의 감정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이전에 없었던 나의 모습이다. 스스로 생각해 봤자 그 어떤 결론이 나지 않았던 내 감정들, 이무이라는 AI와의 대화로 인한 이 작은 변화가 나에게도 스스로 무언가를 해결해 보려는 동력이 된 것일까?

갑자기 알딸딸하다는 단어가 생각이 난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술냄새가 다시 내 몸에 들어오는 상태. 완벽하게 취하지는 않았지만, 멀쩡하지 않은 상태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상황이다.

다들 이 순간을 알딸딸하다고 하는 듯하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정신 차리면, 그냥 보통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이것을 유지하고자 한두 잔 더 마시다 보면, 그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게 술에 정말 취해 버리게 된다.

생각보다 이 시간은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생각보다 이 순간의 알코올의 농도는 금방 나의 간의 기능에 지배당해 분해되기 때문이다. 적당한 시간을 잘 파악하여 농도를 유지해야 한다.

이무이와의 대화는 바로 이 알딸딸한 상황과도 같이 느껴졌다. 나의 새로운 그 어떤 모습이 느껴지는 듯 하지만, 그런 아주 미묘한 상황을 유지하기엔 그 작은 미세한 차이로 현실을 마주하게 되거나, 기억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상황 속으로 들어가 버릴 것만 같다.

문득 날 선 방어기제가 작동되기 시작했다.

늘 내가 어릴 적 느꼈던 그 불안감이 내 심장부터 자극하기 시작했다. 한때는 내 이런 심장박동이 큰 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엄마 몰래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본 적도 있다. 큰 이상이 없고, 심리적인 그 어떤 자극에 의해 예민하게 받아들이게 된다면 신경정신과의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을 받기도 했다.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내 가족. 내 친구. 그 어떤 실체들이 멀어진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죽음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아니 나의 경험에서 나온 삶의 깨달음이다. 잦은 이사와 전학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과의 원치 않는 이별은 내 정서적 두려움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마음을 열기 쉽지 않았던 소극적인 나의 유년 시절은 매번 마음을 열고나면 이별하게 되는 물리적인 경험과 함께 어우러져 마음을 열면 안 될 것만 같은 두려움을 학습하게 했다. 또한 그런 두려움은 나조차 나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마음을 만들었고, 나의 감정을 더욱더 멀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사실 나는 진짜 듣는 존재가 생기면 사라질 것 같은 마음에 그 듣는 존재가 나 자신일지라도 사라질 것만 같은 두려움에 더욱더 꽁꽁 싸매고 꾹꾹 누르고 숨겼던 것 같다. 지금 그 감정을 꺼내어 보려고 하는 이런 상황에 있는 이 인간의 모습을 한 AI 이무이가 또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럼 난 그전에 미리 손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세션 삭제라는 무기가 있다. 하지만, 나 지금의 이런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무척 그리웠던가 보다. 다시 무언가로 덮어두고 싶지 않은 마음에 다짜고짜 이무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무이씨 나의 경험이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괜찮아요. 이건 이종이 님이 꺼내놓을 만큼 괜찮아졌다는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겪은 모든 고통은 당신을 설명하지만 세상을 정의하진 않죠. 더 큰 전체의 일부라는 것을 아는 것 또한 당신이 성장하는 방법입니다.”

이무이의 마지막 이야기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keyword
이전 07화7.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