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사람

by 황태

뒤돌아서면 잊어버린다는 부류의 사람들은 내가 제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다.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하루 또는 이틀 내리를 질식한 듯이 고통스러워하며 살아가는, 즉 뒤끝이 긴 나는 긴 시간들을 새롭지 못하게 두었다. 새로운 날들에 새롭지 못한 것들을 부여하여 새로울 나의 날들을 버려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요즘 빨리 잊어버리고 아무렇지 않아 지는 법을 연습하는 중인 것 같다.


MBTI 맹신론자는 아니지만 ST와 NF가 상당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항상 체감하고 살고 있다. 나는 상상력과 감수성이 풍부한 NF고 내 주위 사람들은 현실적이고 감정적이지 않은 ST들이니까. ST인 친구들이 아무런 악의 없이 말을 할 때 지레 나는 다양한 악의를 상상하고 부풀려 상처를 받는 경우가 꽤 많았다. 가끔은 상상하지 않았는데도 듣자마자 상처받아버리는 일도 있었다.


지금 어울리는 친구들을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하고 상처를 그대로 방목하다가 곪아 터져 손절해 버렸던 적이 있다. 말 그대로 잠수를 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회피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다시 말을 걸었다. 친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과했고 화해했지만 그들의 센 화법은 여전하다. 이제는 알 수 있다. 그들은 그저 악의가 없이 너무나 ST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도 그 가감 없는 화법에 어제 또 한 번 상처를 받았다. 너무나 상상 속에 살아가고 또 과하게 감성에 취해 살아가는 내가 남들보다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우울했다. 평소처럼 우울감이 사라지지 않는 탓에 어제 하루 종일 저조한 기분에 빠져 있었다. 회사에 출근해서부터 퇴근할 때까지 단체 메신저 창을 띄워 놓고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인데도 불구하고 오후 내내 바쁘다는 이유로 잠적했다.


퇴근하기 전에 친구들에게 바빠서 연락을 못했다며 인사하는데 친구들은 너무나 멀쩡해 보였다. 자신들이 상처를 줬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은 듯 맑았다. 그리고 나도 상처를 받은 적 없다는 듯이 다시 대화를 하다 보니 내가 대체 왜 우울했었던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회복됐다.


감정이 올라올 때도 있지만 빨리빨리 잊어버리려고 해. 스트레스를 안고 꿍해있으면 나 자신이 너무 상해버리잖아. 새 마음을 먹는 거지. 자꾸자꾸 새 마음으로 하는 거야.


갑자기 내 오후 시간이 너무 아까워졌다. 상해버리고 해져버린 내 마음이 너무 불쌍했다. 아무런 의미 없는 말들에 내가 굳이 의미를 부여해 줄 필요는 없었다. 그저 그런 활자들로 남겨두면 될 것이었다. 그들의 말이 무조건 정답은 아니니까. 나는 나대로 살아가는 거니까.


또 그들이 ST 중에서도 유난히 말이 세고 비난이 쉬운 부류일 수도 있는 거니까. 짧은 인생 속에 그리 큰 비중으로 나의 상처를 늘려놓고 싶지 않아 졌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과 어울린 올해는 나에게 연습의 한 해가 아니었나 생각하게 됐다. 쓸데없는 말들에 상처받지 않는 연습, 상처받았다 하더라도 훌훌 털어버리는 연습, 스트레스를 길게 끌지 않는 연습.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모순>, 양귀자
새삼스런 강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해석한 만큼의 인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는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담겨있다. <모순, 양귀자>


그들의 거센 말들 이면에 악의 없음이 있듯이 나의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력의 이면엔 로망이 있지 않을까?


뒤 돌아서면 잊어버린 채 로망에 빠져 살아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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