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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으로 주어진 시간

감동적인 완수

by 황태
내가 종일토록 기쁨을 누렸다는 사실이
유별난 성공으로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행복해진다는 것만을
하나의 의무로 삼는
인간 조건의 감동적인 완수라고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기대를 갖지 않는 방법을,
그리하여 현재를 우리에게 '덤으로' 주어진
유일한 진실로 간주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결혼. 여름 알베르 카뮈



덤에 대해 생각해 본다. 덤의 사전적인 의미는 제 값어치의 물건 외에 조금 더 얹어 주고받는 일 또는 물건이다.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정해진 인생의 총량 외에 덤으로 주어진 것이 나의 현재라면? 다시 한 번 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렸을 때 시장에 채소를 사러 갔을 때 아주머니가 덤으로 더 주신 채소의 양이 생각난다. 딱 한 줌이었다. 그렇게 덤으로 받은 한 줌이 지금의 내 현재라면? 가슴이 떨려온다.


얼마 전 아빠가 쓰러지셨을 때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쓰러지셨을 때 아빠는 마음속으로 죽음을 준비하셨다고 했다. 다행히 쾌차하셨지만 현재 몸의 40%는 죽은 기분이라고 하셨다. 쓰러지시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노화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매일 조금씩 죽어간다. 연세를 생각했을 때 이미 40%는 기능을 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본다. 지금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이 내게 주어진 덤이라면?


상상을 해본다. 나의 30대를, 40대를 꿈꿔본다. 만약 내가 회사를 일찍이 그만두게 된다면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시간은 퇴사하기 전 덤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이 된다. 매일 판으로 찍어낸 듯이 똑같은 루틴 안에서 한 치의 오차 없이 똑같은 업무 처리를 해야 하는 시간들 속에서도 지루함을 느낄 수 없게 된다. 내리치는 키보드 엔터키의 소리가 사뭇 막중하다. 내가 엔터키를 칠 수 있는 날이 줄어들고 있다.


최근 시험기간이라 공부도 하고 과제도 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과제 중에서 좋아하는 소설을 고른 뒤 비평하는 과제가 기억에 남는다. 내가 고른 책은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이었다. 중고로 산 책에 파란색 볼펜을 들고 30장 남짓의 페이지들을 반복해서 읽으며 작가가 얼마나 정교하게 이 소설을 기획했는지를 찾아 헤맸다. 재미있었다. 내가 과제가 재미있어지는 순간이 오다니 놀라웠다. 내게 얼마나 많은 과제를 할 수 있는 시간들이 남았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별로 남지 않았다. 덤으로 주어진 과제다.


돌이켜보니 나의 모든 일상들은 덤으로 조직되어 있었고, 나의 현재는 오직 덤일 뿐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기대감이 사그라들었다. '기대해 봐야 무엇하리!'라는 생각이 아니라 '기대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다. 기대감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나는 우습지만 글을 쓰기 전부터 기대한다. '아 오늘은 어떤 글이 내게 와줄까?'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하면 글은 절대 써지지 않는다. 알면서도 항상 기대하곤 한다. '그저 편안히 아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 고찰해 볼까'라고 생각하면 글이 쉽게 내게 다가온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나는 왜 기어이 글을 쓰고 있는지에 대한 답이 나왔다.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에 대한 답도 있다. 나는 그저 나의 시선이 닿는 것들에, 나의 마음에 울림이 오는 것들에 대해 주절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기대감에 무색하게도 나는 그저 그런 가벼운 글쟁이다.


최근 고민이었던 회사의 연봉이나 기타 처우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만약 내가 회사 연봉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운명이 아니라면? 그렇게 생각하니 오백만 원, 천만 원 연봉을 올리겠다고 현재에 아쉬워하고 다른 곳에 도전할 생각에 고민한 시간들이 부질없어졌다. 기대감이란 생각보다 허무한 것이다. 기대라는 하나의 감정일 뿐인데 그에 비해 겪게 되는 고통의 시간들이 너무 크다.


기대감을 버리고, 현재를 내게 주어진 덤과 같은 것으로 치부할 수 있게 되었다면 나의 시간들은 무거운 짐을 덜어놓은 것 마냥 가뿐해진다. 이가림의 시가 떠오른다. 죽음으로 가는 길을 마치 뒷주머니에 칫솔 하나 꽂지 않고 떠나는 즐거운 여행이라고 표현했다. 현재는 그리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죽음에 대한 생각은 그렇게 가뿐하고 경쾌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이 모든 것이 산뜻해져 다만 덤으로 느껴질 때 종일토록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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