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을 하다 보면 "다시 하겠습니다"라는 학생이 간혹 있다. 그러나 첫 번째 시도를 넘어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에너지는 이미 꺾였고 초조함에 집중력은 반감되기 때문이다. 기말이다. 내일은 학생들의 첫 공연이다. 이미 긴 여정을 달려왔기에 체력은 기진하고 온 신경은 곤두서있다. 피드백을 받는 그들의 표정은 심란하고 예민하다. 안다. 아직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결과물은 없다. 후회, 원망, 불안, 체념, 분노.... 모든 것을 리셋하고 싶을 때다. '거의 다 왔다'라는 말이 별다른 위로가 되지 못한다. 빛의 무대로 걸어 나가 관객을 만날 때까지, 그들이 준비한 모든 것은 아직 무대 뒤 어둠 속에 그림자로 묻혀 있을 뿐이다. <여인의 향기 Scent of a Woman>에서 괴팍한 맹인 중령 프랭크는 착한 알바 학생 찰리를 끌고 뉴욕시로 날아간다. 호텔의 근사한 식당에서 여인의 향기가 난다며 너스레를 떨던 그는 홀로 앉아있던 여인 도나를 찾아가 마침 연주되는 음악에 맞춰 탱고를 출 것을 제안한다.
도나: 전 겁이 나요. 프랭크: 뭐가 겁이 나죠? 도나: 실수할까 봐. 프랭크: 탱고에서 실수라는 건 없어요, 도나. 인생과는 달라요. 간단하죠. 그래서 탱고가 대단한 거예요.실수를 하고, 스텝이 엉켜도, 계속 추면 되죠. (If you make a mistake, get all tangled up, just tango on.) 프랭크가 암흑 속에서 탱고의 마법을 빚어내듯, 이제 어린 배우들은 내일 밤 온 세상이 지켜보는 무대로 나가 탱고를 출 것이다. 실수를 하고 스텝이 꼬여도, 계속 추면 그게 그대들의 탱고다.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고 눈부신 조명이 무대를 밝힌다. 어둠 속의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춤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눈을 맞추고, 손을 맞잡고, 서로의 숨결을 느끼며, 빛 가운데로 걸어 나간다. 함께 내딛는 첫 스텝의 떨림, 첫 대사의 설렘. 고된 산고를 거친 어둠 속염원은 그렇게 아름다운 춤의 실체로 세상에 태어난다.
한번 시작한 탱고는 멈추지 않는다. 인생도 멈추지 않는다. 중단도 없고 "다시 하겠습니다"도 없다.
영화에서, 삶을 비관한 프랭크는 편도 티켓을 끊어 뉴욕에 왔다. 자신의 버킷 리스트를 이루고 난 후 숙소에서 총을 꺼내든 그를 찰리가 막는다. "스텝이 엉켜도 계속 탱고를 춰야 한다"는 그의 말에 프랭크는 인생은 망할 탱고가 아니고, 자신은 암흑에 갇혀있다고 절망을 쏟아낸다. 그러나 찰리는 프랭크의 손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탱고의 단순함은 인생과 다르다는 프랭크의 말은 영화 클라이맥스에서 역설적으로 인생이 탱고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의 페이오프(payoff)로 완결되었다. 맹인과 탱고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만나 좌충우돌 스텝이 엉켰지만 이들은 결국 서로를 붙들고 인생의 탱고를 멈추지 않은 것이다.
연기는 인생이 아니고, 무대는 현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탱고를 준비하고 춤추며 느꼈던 모든 순간들, 함께 꼭 붙들었던 그 값지고 고된 경험이, 훗날 복잡한 인생의 어려운 길목에서 멋진 탱고로 돌아와 다시 한번 그날의 마법을 재현해 낼 수 있기를 소심한 선생은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