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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lle Sep 02. 2024

03. "당신에게만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개강 첫 주. 피교수는 회전의자를 창 쪽으로 돌려놓고 난감한 표정으로 통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교수님, 그날은 제가 안 되... 네? 그땐 제가 술김에 그냥 별생각 없이. 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여튼 내일 일단 뵙고 말씀 드리…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이고, 선배는 무슨… 착한 내가 참는다 참…”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려 의자를 돌리다가 화들짝 놀랐다. 어떤 학생이 방에 들어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아 깜짝이야. 누구야?”


“성동희입니다… 영문과 4학년….”


“근데 이 늦은 시간에... 것보다 왜 함부로 여기 들어와 있지?”


“아,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는데, 손짓을 하셔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내가?”


“네, 이렇게…”


허공을 더듬는 그의 하얗고 긴 손가락들을 보며 피교수는 갑자기 싸아한 느낌이 들었다. 문은 분명 닫혀 있었고, 손짓을 한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굳이 따져 묻는 것도 괜한 시비 같아 보였다. 통화의 찝찝함과 예상 못한 침입자로 불편함이 스멀 올라왔지만, 그는 새 학기면 으레 찾아오는 예민함 탓이라 생각하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넨다.


“아 그랬나? 미안. 근데 이름이 뭐라고 했지?”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동희... 성동희.”


“그래, 동희로구나. 가만… 전에도 내 수업 들은 적 있나?


“아니오.”


“그래? 근데 낯이 익는데… 우리가 구면이 아니라고?”


학생은 대답이 없다. 안경 속 그의 눈은 퀭하고 눈동자의 시선은 피교수를 향하고 있지만 그의 눈동자는 바짝 마른 것처럼 아무것도 반사하고 있지 않았다. 피교수는 눈길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 점호 시간도 지났을 텐데, 무슨 일이지?”


“제가 영문학사 첫 수업을 놓쳐서요. 조부상 때문에요… 근데 사망진단서를 못 가져왔는데…”


“아 됐네. 제자 말을 믿어야지. 그런데 할아버지는 지병이셨나?”


“아뇨, 살해당하셨습니다… 무장공비한테….”


“야야, 너무 화끈하잖아. 할아버지 화내시겠다. 가만 이 얘기도 내가 전에 들은 거 같은데? 야아 이제 결석 사유도 족보로 만들어서 돌리나 응?”


“정말인데요…”


“뉴스에서 못 봤는데?”


“정말입니다. 산에 나무하러 가셨다가 공비랑 마주치셔서… 돌아가셨는데.. 눈 코 입이 면도날로 모두.. 그리고 두개골은 두 군데가 함몰되었고 시체는 일주일 동안 방치되어서 심하게 부패…”


“그만. 알았네...”


자기 할아버지의 죽음을 신문 기사 읽듯 감정 없이 읊조리는 것도 불편했지만, 야밤에 방안에 들어와 그림자처럼 서 있던 모습, 그에게서 느껴지는 불쾌한 한기와 마른 눈빛, 감정 없는 말투, 과거의 어느 지점과 자꾸 중첩되는 기시감… 이 학생에 관한 모든 것이 이질적이고 모든 것이 불편하게 낯익었다. 데자뷔라 하기에는 뭔가 더 구체적이고, 동시에 안개처럼 막연한, 뭔가 도망치고 싶은 초조함… 출석부를 뒤적이는데 머리가 복잡해서 갑자기 그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맹조교는 출석부를 어떻게 정리해 놓은 거야. 미안. 이름이…”


“성동희….”


피교수는 종이를 뒤적일 때마다 조금씩 숨이 차오름을 느낀다. 추스를 새도 없이 빨라지는 호흡에 얼굴이 벌게진 그는 갑자기 주문을 깨듯 탄성을 지른다.


“아 여깄다! 자 출석 처리. 됐지?”


그는 절을 하고 돌아서서 걷는데, 왼쪽 다리를 조금씩 절고 있다. 피교수는 놀라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 자네 다리….”


동희는 돌아서지 않은 채 멈춰 선다.


“네.”


“다쳤나?”


“네.”


“왜?”


“연극하다가…”


“연극? 무슨 연극?”


“기억 안 나세요? 저 잘한다고 하셨는데…”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긴 손가락을 피교수를 향해 뻗으며 대사를 한다.


“같이 가자고 당신에게 손짓합니다. 당신에게만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가 몸을 돌려 한 발을 조용히 끌며 문을 열고 나가려 할 때 피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너! 사망진단서. 그래 사망진단서를 가져와. 공결 처리를 하려면 그게 필요하니까 할아버지 사망진단서를 꼭 가져와. 알았나?”


잠시 말없이 서있던 그는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대답을 듣지 못한 피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벌컥 열었다. 어두운 긴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야기를 마친 피교수 앞의 커피는 어느덧 차갑게 식어 있다. 맹조교는 멍한 표정으로 피교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젓는다.


“아 미치갔네… 그러니까, 갸가 누구란 말씀인교?”


“성동희... 아니 12년 전 죽은 서동성.”


“연탄가스로 죽은? 야가 갸면, 12년 전 갸도 할아버지가 무장공비한테 죽었단 말인교?”


“그렇지. 그때도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네.”


“하하하! 교수님 요새 논문 쓰느라 너무 과로하신 거 아입니까?”


“날 못 믿나? 이 똑같은 사진들이 안 보여?”


“교수님, 이거 다 다릅니다. 얼굴 형도 다르고, 이제 보니 머리 모양도 다르네. 이 둘은 이름만 비슷하고 다 딴 사람이네!”


“그럼 할아버지가 무장공비에게 돌아가신 것도 우연의 일치라고?”


“아 공비들이 한두 번 내려왔습니까? 국민들 사기 때문에 놓친 간첩은 신문에도 안 난다 카던데요.


“그럼 다리를 저는 건?”


“것도 그렇죠. 다리 저는 사람이 어디 한둘입니까?”


“동희가 말한 대사가 어디 나오는 건지 아나?”


“엄, 맥베스?…”


“햄릿이야. 선왕의 유령이 다시 나타났을 때 호레이쇼가 햄릿에게 한 대사야.”


“그럼 동희가 호레이쇼 역을 했고…”


“난 동희를 지도한 적이 없어. 그리고 12년 전 연극부에서 동성이가 맡았던 역이 호레이쇼였네. 내가 지도교수였고.”


“햄릿이야 워낙 자주 하는 연극 아닙니까…”


“동성이는 그 연극을 연습하다가 다리를 다쳤어.”


“아니 뭐 연극하다가 많이들 다치기도 하고…”


“학과장님, 근데 동희가 한 대사가 좀 이상했단 말야”


“아 뭐가요 참말로!”


“찾아보니까 걔가 한 대사에는 원문의 주어가 빠져있어. ‘유령이 손짓하고, 유령이 당신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해야 하는데 주어를 빼버렸어.”


“뺄 수도 있지요. 뭐 셰익스피어 수업 시간도 아니고.”


“동희는 왜 주어를 빼고 말했을까?”


“아 말씀드렸잖아요!”


“자신이 주어이기 때문 아닐까?”


“뭔 주어요… 유령?”


“그래. 동성이가 동희라는 유령으로 찾아와서 내게 손짓하고 할 말이 있다고 한 거라면?... 성빈이 재현이도 모두 나를 찾아온 동성이었다면?”


침묵이 흘렀다. 밖은 어느새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고, 강해진 비바람은 화가 난 듯 창문을 마구 두들기고 있다. 맹조교는 느닷없이 탁자를 쾅 치며 언성을 높였다.


“귀신은 개뿔! 우리 학교가 시골 구석에 있어서 그런지 귀신 얘기 많심더. 기숙사 화장실에서도 귀신 봤다 카고, 뒷동산에 인민군 소년병 귀신, 양호실에 처녀귀신, 뒷동산에 할배 귀신 뭐 많이 돌아다닌다 카데예. 그건 다 애들이 지어낸 얘기지요. 근데 이건 뭡니까. 우리가 아는 학생이 죽었어. 근데 그 학생이 올림픽 출전하듯이 12년 동안 4년마다 작정하고 이름 바꿔가며 찾아와. 이거 귀신 주제에 너무 치밀한 거 아입니까? 이게 진짜 귀신이면.. 와 진짜 무서운 놈이네.”


“하하, 난 사람이 더 무섭네만.”


“교수님, 지금이 농담할 땝니까! 그 서동성이 귀신이라 칩시다. 그럼 교수님한테 원하는 게 뭔데요? 뭐 12년 동안 찾아와서 어디로 데려가겠다는 건데요? 따라가시면 즐~대 안 됩니더!.”


“오호, 우리 학과장님 내 걱정해 주는 건가?”


“아니고요. 우리 동네에서도 귀신에게 홀려가 미쳐버린… 내가 지금 무신 소리 하고 있노? 흠흠, 아무튼, 귀신은 없고요, 이 사진들은 다 다른 사람들이고요, 성동희는 교수님에게 귀신 취급당하고 있는 불쌍한 복학생입니더. 끝!”


“그래 고마워. 그럼 자네는 임성빈 군을 좀 수소문해서 찾아줘.”


“제 말 못 알아들으셨심꺼?”


“에이 동기잖아. 부탁 좀 하자~”


“그 까망귀신요? 오마 미치겠네. 걔는 또 와 별명이 귀신이고.”


“쉽진 않겠지만 동문들을 수소문해서라도 찾아봐줘.”


“만약 찾으면요?”


“그럼 간단히 밝힐 수 있겠지. 성빈이가 12년 전 동성인지 아닌지.”


“오케이. 뭐 주민등록증이라도 뺏어와서 교수님이 틀렸다는 것을 밝혀드리죠. 그럼 교수님은요?”


“김재현 군에 대해서 찾아볼게. 그리고 동희는 어쨌든 사망진단서 들고 돌아오지 않을까?”


“당연히 갖고 오겠죠. 지금 한밤중에 잡히는 단파 무전이 수천 개랍니다. 썩어질 북괴놈들.”


“나도 내가 틀렸음 좋겠어. 근데 야 상상해 봐… 걔가 또 내 방에 훅 나타나. 그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낡은 봉투를 이렇게 내밀어.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봉투를 열어 진단서를 펼쳐봐. 사망날짜가 쓰여있어… 1971년…”


“아 교수님!”


“그 순간, 내가 아는 세상은 거기서 끝나는 거야. 그때부터 난 어떡하지? 죽었는데 돌아온 그 미지의 존재를 난 어떻게 대면하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아니 난 반응하지 않을 거야. 내가 알던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붙들기 위해 난 그 아이를 외면할 거야. 그냥 그러다가 사라질 수도, 이 모두가 꿈일 수도 있잖아? 와우 그런데... 걔가 입을 여네. 무덤이 갈라지는 소리, 배가 암초에 걸려 끼익 끼익 하는 소리처럼 걔의 입 여는 소리가 들려. 그리고 낡은 문이 끼익 거리는 소리로, 신음처럼 한숨처럼 걔가 말하기 시작해. 교-수-님... 같이...가요...


"출석부에 갸 이름이 있었다면서요!?"


"아니... 없었어."


피교수의 허무한 표정에 질린 맹조교는 냅다 탁자를 내리치며,


제발 고만하소 마..!”


순간 창문이 쾅 하는 큰 소리와 함께 활짝 열리고 거센 바람이 치고 들어왔다. 액자가 바닥에 떨어지고 시험지들과 사진들이 흩날렸다. 두 사람은 펄쩍 뛰며 으악 비명을 질렀고 그 바람에 커피잔이 엎어졌다. 피교수는 급히 창문을 닫아걸고, 맹조교는 시험지들을 챙긴다. 피교수는 액자를 바닥에 기대어 놓은 채 사방에 흩어진 사진들을 부지런히 주워 모으고, 맹조교는 구시렁거리며 테이블의 쏟아진 커피를 닦고 잔을 챙긴다. 라디오에서는 태풍에 대한 속보가 나지막이 흘러나오고 있다. 맹조교는 사진들을 다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피교수를 보다가 시험지 뭉치를 책상에 쿵쿵 치며 과장하여 너스레를 떤다.


“아 이거 어쩌나. 채점할 게 산더민데 시험지가 뒤죽박죽 에이 리듬 다 깨졌네. 아 오늘 밤새야 하는데, 태풍도 오고, 배도 고프네. 아 배고파~. 교수님, 밥 좀 사주이소! 네?”


“응? 밥… 좋지. 간만에 두부김치에 동동주도 한잔 어때?”


“참말요? 우리 소금쟁이 교수님이 웬일이십니꺼! 야 귀신이 좋네!”


“태풍 오기 전에 후딱 다녀오지. Follow me.”


피교수는 우산과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나선다. 맹조교는 냉큼 따라나선다.


“네 따르겠습니다. 그것이 저의 의무니까요.”


“따르고 싶은 것은 내가 아니라 동동주가 아닌가?”


“교수님, 전 교수님이 정말 좋습니더! 삼겹살은 억수로 더 좋고요.”


두 사람은 처음으로 웃으며 함께 방문을 나선다.


불 꺼진 빈 방. 켜 놓고 간 라디오에서 정수라의 “바람이었나”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제는 너를 잊어야 하나 그냥 스쳐가는 바람… 바-바-람-바바-바바-치-치-치익-이 이익-킥-히익-키키익-…”


라디오의 노래는 치익 키익 소리를 내다가 잡음 섞인 큭큭 소리로 바뀌었다. 절반쯤 열린 커튼 사이로 오렌지 빛 가로등불이 렘브란트의 그림 일부를 비치고 있다. 그림 속에는 캔버스가 여전히 문 옆에 서있다. 어둠 속 화가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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