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가 인석이 입을 꼬집어 당기고 달아난다. 인석이가 벌떡 일어나 절뚝거리며 민주를 쫓는다.
“야 민주, 너 죽었… 에고고!”
인석이 중심을 잃고 자전거에서 내리던 연주를 껴안는다. 연주는 반사적으로 인석의 머리를 들이받고 둘은 중심을 잃고 버둥거리다가 자전거와 함께 나뒹군다. 비명과 웃음소리가 동시에 터진다. 석양이 기울기 시작한 교정의 스피커에서는 애국가가 울려 퍼진다.
1983년은 격동의 해였다. 소련의 KAL007기 격추와 아웅산 테러로 한반도의 전쟁 위기감이 극에 달했고, 북한의 미그기 귀순과 피납된 중공 민항기의 착륙으로 공습경보와 함께 “공습을 당하고 있다”는 방송이 나가 국민들이 혼비백산하기도 했다. 한편 여의도광장을 사람과 벽보로 가득 메운 4개월 간의 이산가족 찾기를 보며 온 국민이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곱씹었다. 그럼에도 보이는 일상은 활기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2년째를 맞은 프로야구는 관중들이 가득 찼고, 청소년 대표팀은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최초로 4강에 올랐다. “아기 공룡 둘리”와 “공포의 외인구단”은 국민 만화로 모두를 즐겁게 했고, 청년들은 윤수일의 ‘아파트’와 인순이의 ‘밤이면 밤마다’를 합창하며 나이트에서 젊음을 불살랐다.
그러나 83년의 대학가는 낭만과 고뇌에 칭칭 휘감긴 라오콘의 상아탑이었다. 꽃들이 싱그럽게 만발한 교정에는 최루탄 파편과 깨진 벽돌 조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매캐한 최루탄 연기를 마시며 눈앞에서 머리채를 잡히고 옷이 찢긴 채 사복경찰들에게 끌려나가는 학우들을 무력하게 지켜본 수치와 충격은 평범한 청춘들의 설레는 미래를 질식시켰다. 연인을 만나 마셨던 달콤한 커피는 암울한 시대를 개탄하는 소주의 쓴맛과 뒤섞여 구토로 쏟아져 나왔다. 트로이 전쟁처럼 캠퍼스를 방벽 삼아 끝없이 밀고 밀리는 학생들의 스크럼과 전경의 방패, 신도 영웅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평범한 청춘들의 사투는 연옥처럼 무한히 반복될 것만 같았다.
강원도 어느 바닷가 근처 산기슭에 호젓하게 자리 잡고 있는 아담한 규모의 백양대학은 수도권과 대도시의 그 뜨거운 열기로부터 어느 정도 비껴나 있었다. 이 대학은 일제강점기에 간호전문학교로 시작했는데 태평양 전쟁 중에는 병동들과 막사들이 제법 큰 규모로 줄지어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에도 간호전문학교로 운영되다가 한국 전쟁 당시에는 국군과 인민군이 이곳을 번갈아 야전병원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고 휴전 직전에는 이 지역에서 한치의 땅이라도 더 지키고 빼앗기 위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기적적으로 파괴를 면한 이 대학은 우여곡절을 겪어 작은 종합대학으로 승격했고 별로 알려지지 않은 지방대학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외부로 통하는 도로가 하나뿐인 이 대학에 일단 들어서면 묘한 편안함과 고립감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데, 산과 바다에 둘러싸여 몰려오는 파도와 바다 안개를 보고 있노라면 이곳이 휴양지인지 유배지인지 혼란스러워진다고들 한다. 워낙 외진 곳에 있어 대부분의 학생들은 기숙사에 살고 있고,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다소 둔감하다. 대신 풍상을 많이 겪은 듯 낡은 엽서처럼 빛이 바랜 캠퍼스 곳곳에 배어 있는 현재와 과거의 풍문과 기담들은 활발하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네 친구들은 바다를 면하고 있는 야외극장 가두리에 서서 바다의 석양을 바라보고 있다. 붉게 물든 바다와 안개 기둥, 교정을 밝히기 시작한 오렌지 빛 가스등은 창백한 건물들에 묘한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한껏 내뿜고 있다.
민주는 손을 뻗는다. 안개를 쓰다듬듯, 파도를 달래듯, 아니면 하늘에 글씨를 쓰듯, 그것도 아니면 붉은 수평선과 안개의 장막 너머의 누군가를 그리워하듯 눈을 감고 그렇게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다. 바람이 점점 강해지면서 안개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민주는 손바닥을 때리는 바람을 움켜쥐듯 주먹을 쥐고 눈을 떴다. 송희가 입을 열었다.
“태풍이 정말 오려나.”
“왔음 좋겠다…”
민주가 눈가의 안개를 닦으며 말했다.
“인석아 식당까지 나랑 경주하자. 넌 자전거, 난 달리기. 밥값 내기다!”
민주는 냉큼 앞서 달리기 시작한다.
“야 기다려! 아고 내 다리.”
인석이는 휘청거리며 자전거를 타고 따라나선다. 세 사람도 석양을 등지고 발걸음을 돌린다. 안개에 싸여 부옇게 타오르며 기울던 붉은 태양은 어둠과 먹구름에 삼켜져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