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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lle Sep 01. 2024

02. 한 사람, 네 개의 이름


‘시작은 어디였을까? 그것은 끝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시작일까?’


캄캄한 창고에서 깊숙이 묻혀 있는 물건을 더듬어 찾듯이, 피교수는 희미한 이미지, 사라진 감각, 부연 기억을 헤집으며 과거의 먼지들을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럽지만 지금 찾지 않으면, 무언가 손에 잡히지 않으면 이 시간은 등 돌려 사라질 것이고, 이 어색하고 이질적인 각성의 순간도 무심한 시간의 더미 속에 더 깊이 가라앉아 다시는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의 마음은 급해졌다. 그의 시선은 다시 한 바퀴를 돌아 벽에 걸린 그림에 멈춰 섰다….


이곳은 백양대학교 영문학과 피교수의 연구실. 빛바랜 블라인드 사이로 짙은 구름에 숨이 막힌 희미한 저녁 햇살이 마지막 한숨처럼 힘없이 스며들고 있다. 태풍을 예고하듯 성난 바람은 창문을 계속 두들기며 덜컹 소리를 내고 있다. 연구실 벽 전체를 둘러싼 책장에 꽂힌 책들은 비교적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끝으로 갈수록 눕거나 허물어진 책들이 많아, 어느 순간부터 책정리를 포기한 흔적이 역력하다. 책상 위에도 강의 자료와 책들이 어질러져 있고, 벽에는 시간이 멈춘 시계와 해묵은 달력, 그리고 먼지 낀 액자 속에 렘브란트의 자화상 “작업실의 화가”가 비뚤어진 채 걸려있다.



피교수는 골똘히 생각에 잠길 때면 이 그림을 보곤 했다… 회칠한 벽 곳곳이 갈라져 있는 초라하고 단출한 방. 화가는 빛을 등에 지고 붓과 팔레트를 손에 들고 캔버스를 응시하고 있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자신감 넘치는 다른 자화상과 매우 다르다. 화가의 얼굴은 어린아이 같고 캔버스를 응시하는 그의 표정은 위축되어 보인다. 화가와 캔버스의 기울어진 비율도 눈길을 끈다. 문 옆에 세워진 캔버스는 거대한 크기로 전면에 배치되어 있고, 어린 화가는 어둠에 반쯤 묻혀 왼쪽 구석에서 그를 압도하는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그 거대한 캔버스로 다가갈 생각일까, 아니면 막 뒷걸음쳐 물러난 것일까? 손에 든 붓은 이제 캔버스로 향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념하고 내려놓기 직전인 것일까? 캔버스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을까 아니면 텅 비어있을까? 이 묘한 그림이 던져주는 모호함은 피교수가 살아온 인생의 여정과도 맞닿아 있다. 어느 시점부터 무너진 책들처럼 부유하듯 흘러온 인생. 캔버스 속 세상에 더 다가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는, 붓을 들고 있기엔 무겁고 내려놓기엔 용기가 없는, 그래서 피교수는 저 어린 화가처럼 세상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기꺼이 그 정지된 미결(未決)의 평화를 언제까지나 누리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연구실 문 쪽 구석에는 피교수의 조교인 맹정환 군이 작은 책상에 앉아 열심히 수십 장의 시험 답안지를 채점 중이다. 그는 영문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피교수의 조교인데 학부까지 치면 무려 10년을 이 대학 영문학과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터줏대감이다. 학생들에게 “학과장”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그는, 검은 뿔테 안경, 비듬이 듬성듬성 기어 나온 뒤엉킨 곱슬머리, 오각형의 거무스레한 얼굴, 약간 튀어나온 눈과 두툼한 입술, 턱에 박힌 커다란 점, 땅땅한 체구, 한 여름에도 꼭 챙겨 입는 구깃구깃한 까만 정장 등 그 모든 조합은 12년 차인 피교수보다 더 교수처럼 보이는 인물이다. 그가 대학원 진학하고 고향에 내려갔을 때에는 “맹정환 교수 환영”이라는 현수막이 마을 어귀에 붙어있었다는 소문도 있다. 피교수는 고분고분하지도 않고 매사에 교수를 가르치려 드는 그를 무슨 이유에서인지 몇 년째 조교로 자기 방에 두고 있다.


9월의 어느 날 저녁. 라디오에서는 오키나와를 향해 북상하고 있는 대형 태풍 포레스트에 대한 뉴스가 나른하게 흘러나오고 있다. 피교수는 한 시간째 회전의자를 삐그덕 거리며 빙글 돌리고는 그림을 보다가, 다시 한 바퀴 돌고는 그림을 보는 행동을 반복하는 중이다. 마치 꿈속에서처럼 몽롱하게 그림을 바라보던 피교수는 돌이킬 수 없는 충동으로 화가가 캔버스로 달려가 첫 번째 스트로크를 강렬하게 내려 긋듯이, 노트에 무언가를 힘차게 갈겨쓰기 시작한다.


“옳지… 그래… 맞아!”


“아 미치겠네 참말로!”


맞은편에 등을 지고 일을 하던 맹정환 조교가 볼펜을 내리치며 신경질적으로 맹랑하게 끼어들었다. 맹조교가 고개를 돌려 피교수를 돌아봤을 때 그는 무심하게 삐그덕 한 바퀴 돈 후에 무언 가에 홀린 듯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맹조교는 자리에서 일어나 피교수에게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든다.


“교수님! 피교수님!”


피교수는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 건성으로 답한다.


“와 그라노? 채점 다 끝났나?”


“일단 그건 엉터리 사투리시고요, 저 중학교부터 서울서 다녔고요, 아~들은, 아니 학생들은 그 어려운 초서의 ‘캔터베리 테일’로 소설을 써놨고요. 지는 머리 쥐어뜯으며 열심히 채점하고 있고요.”


“엑셀런트! 근데 뭐가 문제일까~?”


“날씨도 심란한데 뭐 하시는 겁니까?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다가 중얼중얼, 또 멍 때리시다가 중얼중얼, 이젠 갑자기 고함까지 빽 질러대고. 그리고 삐그덕 삐그덕 그 의자 좀 가만 두시면 안 되겠습니까? 뒤통수가 근질거려서 집중이 안 됩니다. 아 근무 환경이 이거 뭐꼬?”


피교수는 맹조교의 팔을 잡고 여전히 그림을 보며 붕 뜬 말투로 답한다.


“맹조교야…”


“네!?”


“내가… 놀라운 발견을 했다…”


“에~?”


그는 맹조교를 돌아봤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 맹조교를 빤히 보다가 마음을 정한 듯 말을 이었다.


“맹조교야 우리 좀 쉬었다 하자. 커피 한잔 마실까?”


그는 피교수의 묘한 태도에 답답한 한숨을 토해내며 끙 소리와 함께 답한다.


“초이스 커피로 올리겠습니다.”


“조오치!”


그는 전기 포트에 물을 올리고 커피와 잔을 준비하며 아직도 손가락을 꼽았다 풀었다 하면서 회전의자를 빙빙 돌리고 있는 피교수를 흘끔 훔쳐본다.


“그런데 교수님, 혹시 연애하십니까?”


“연애는 우리 학과장님이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


그는 끙 소리를 내며 그 말을 무시하고 말을 잇는다.


“그럼 어디 빚이라도 지셨습니까?”


“빚 안 지고 사는 사람이 어딨노?”


“제 말은.. 그.. 무슨 고민이 있으시면 애꿎은 의자만 돌리면서 끙끙 앓지 마시고 조교인 저와 상의를 해주시면 작금의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오호, 날 걱정해 주는 거야?”


“그렇게 받아들이시면 당황스럽고요.”


“음… 자자 일단 앉자고.”


피교수는 자리를 옮겨 연구실 중앙 테이블에 맹조교와 마주 보고 앉았다. 그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술을 깨문 채 말없이 티스푼으로 커피잔을 계속 저으며 찻잔 속의 작은 소용돌이를 응시하고 있다.



“교수님… 맹조교 여기 있습니다.”


“음 맹조교, 혹시 이런 경험 없어? 누굴 만났는데 말야, 분명 초면이야. 근데 전에 어디서 본 거 같은..?


“닮은 사람 아닙니까?”


“아니 그냥 닮은 게 아니라 분명히 어디서 본 사람이야.”


“그럼 그냥 기억이 안 나는 거?”


“그거랑은 다르지. 분명히 처음 만난 사람이란 말이지.”


“어허 답답해 죽겠네. 알면 아는 거고, 모르면 모르는 거지 뭐가 그리 흐리멍덩한교?”


“…. 맹조교 혹시 성동희라는 학생 아나?”


“성동희요? 성동희... 몇 학년입니까?”


“4학년. 마지막 학기네.”


“글쎄요.. 한 학년에 70명이 넘다 보니까…”


“그럼 김재현이는 기억나나? 자네 후배였는데?”


“김재현… 누구시더라…”


“임성빈이는? 자네 동기인데?”


“임성빈…아 그… 까망귀신?!”


“까망귀신?”


“맞죠. 그 어디 시골서 올라온 앤 데, 뭐 워낙 내성적인 아라 친구도 별로 없었고, 그 맨날 까맣게 물들인 야상 걸치고 다녔는데… 하도 존재감이 없어서 애들이 걔를 까망귀신이라 불렀죠. 교수님 표정이 와 그러십니꺼?”


“까만 옷을 입고, 눈에 안 뜨였고… 혹시 다리를 절었나?”


“다리요? 기억이 안 나는데… 아 맞다! 2학년 때 전방 실습 갔을 때 유격 뛰다가 다리를 다쳤죠. 우리 조가 갸 들쳐업고 내려오느라… 어 아닌가? 원래 절었나? 갑자기 헷갈리네… 근데 성빈이가 왜요?”


피교수는 맹조교를 빤히 쳐다보다가 책상으로 가서 복사지 몇 장을 가져와 그의 앞에 펼쳐 놓았다. 종이에는 학적부의 학생 사진들이 큼지막하게 복사되어 있다.


“이게 뭡니까?”


“자, 이 사진이 성동희. 지금 4학년 학생이야. 이 사진은 김재현, 자네 영문과 후배. 그리고 임성빈, 자네 동기야.”


“이 사진은요?”


“서동성. 자네 영문과 선배야. 12년 전 내가 부임하던 첫해에 있던 학생이지.”


“근데 이 사진들이 어쨌는데요?”


피교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같은 사람이야.”


“네?”


“잘 봐.”


맹조교는 사진들을 한참 동안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웃갸웃한다.


“맞지? 똑같지?”


“맞다고 하기에는… 이게 복사한 사진들이라 얼굴은 다 하얗고 안경도 비슷하고 눈, 코, 입은 그냥 점찍어놓은 거처럼 보이고…”


“임성빈이는 알아보겠어?”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교무과에서 본 원본들은 더 확실했어. 얘들이 다 똑같은 학생이라고. 12년 전, 8년 전, 4년 전, 그리고 지금!”


“에이 교수님, 무섭게 와 이러십니꺼? 그럼 뭐 같은 사람이 학교를 계속 입학하고 졸업하고, 다시 입학하고 그랬단 말씀이세요?”


“아니 그건 불가능하지.”


“그쵸 그건 불가능하죠. 같은 사람이면 뭐냐 이 성동희가 지금 30 대란 말인데…”


“그게 아냐. 12년 전 학생이던 서동성이는 죽었어.”


“에? 왜요?”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해서 제적되었네. 교무과에서 확인했어.


“아… 근데 교수님 너무 예민하신 거 아입니꺼? 저도 학생들 수백 명 상대하다 보믄 이놈이 저놈 같고, 어제 왔던 놈이 오늘 또 찾아온 거 같고…”


맞지. 나도 늘 그렇게 생각했어. 그날 밤, 동희를 만나기 전 까지는 말이야…”


덜컹덜컹. 덜컹덜컹!


커피 향이 감도는 아늑한 실내를 시샘하듯 바람은 더욱 거세게 창문을 두들겨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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