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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lle Sep 05. 2024

05. 안개와 가스등, 혜린

성동희가 피교수를 찾아온 지 두 주가 흘렀다.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수업도 오지 않았다. 출석을 부르며 한두 번 동희에 대해 아는 학생이 있는가 물어봤지만 다들 대답이 애매했다. 그날 밤의 만남이 끝이었다면 굳이 사망진단서를 가져올 이유도 이제 없을 것이다. 그 아이는 4년 뒤까지는 다시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편으로 안도감이 들었다. 땅거미가 진 후 연구실을 나선 피교수의 발걸음은 야외극장 쪽으로 향했다.


태풍이 지나간 백양대학 캠퍼스에는 이제 가을의 정취가 느껴진다. 교정은 붉고 노란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해가 저물 무렵이면 이 대학 특유의 가스등 불빛이 교정을 동화처럼 물들인다. 80년대와는 동떨어진 시대착오적 유물 같기도 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이 대학은 설립자의 기묘한 유지를 받들어 교정의 모든 가로등은 가스등이었다. 피교수가 이 대학을 처음 찾았을 때에도, 때마침 가득 밀려온 바다안개를 물들이며 가스등이 은은히 빛나는 캠퍼스를 보고 온통 마음을 빼앗겼었다. 목조와 벽돌로 이루어진 고풍스러운 캠퍼스와 낭만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오렌지 빛 가스등 사이를 걷다 보면 마치 시간을 거슬러 고풍스러운 유럽의 어느 소도시로 걸어 들어온 듯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신비한 밤의 색으로 갈아입은 건물들 사이로 세 친구, 민주, 인석, 송희가 기숙사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민주야, 송희야, 너네 얘기 들었냐? 연극반 애들 공연에서 귀신이 튀어나왔대. 조명 다 떨어지고 사람들 다치고 난리도 아니었다는데?"


"오 주여!"


송희는 잠시 눈을 감았고, 민주는 픽 웃어넘긴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데 귀신이라고 가만있겠니? 인석아, 저기 귀신 하나 더 있다."


민주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저만치 조깅복을 입은 학생 하나가 보인다. 술에 취했는지, 뛰다 말다, 뒤뚱뒤뚱, 지그재그, 앞 구르기를 했다가 가로등을 껴안고 기어오르며 킥킥거리고 있다. 인석이가 멍하니 바라본다.


"야 인간의 몸으로 저게 가능한 거냐? 뒤로 재주도 넘네. 술로 각성했네, 와우."


"요즘 캠퍼스에 저런 애들이 부쩍 많아진 것 같아. 학기 초인데 음주에 괴성에 무단 외박에, 수업도 결석이 너무 많더라고. 많이들 힘든가 봐. 주여."


"세상이 비틀거리니까 중생들도 다 비틀거리는 거야. 우리가 곧 다 깨울 거야 송희야."


"역시 민주! 아멘!"


"지겨운 특훈을 끝낸 건 좋은데, 작전 시간이 다가오니 본격적으로 떨린다 민주야.... 민주야?"


민주의 시선은 저만치에서 걸어가는 피교수를 향하고 있었다. 인석은 피교수를 보고 민주의 얼굴을 살핀다.


"저 사람이 누군데?"


"우리 과 교수님."


"오호, 너 저 교수님 좋아하지? 악~!"


"으이구 이 도날드 주둥이."


민주가 인석의 입술을 잡아채고 끌고 간다.


"민주야, 인석이 아프겠다."


송희는 아파 눈물을 흘리는 인석의 뒤를 웃음을 참으며 따라간다.


캠퍼스의 나지막한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는 조그마한 야외극장은 고대 로마 극장처럼 반원형의 계단형 석조 객석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객석과 무대 사이엔 반원형의 잔디밭이 있었고 무대는 공연을 위한 앞무대와 연주를 위한 소라형 덮개가 씌워진 뒷무대로 나뉘어 있었다. 이곳에선 축제기간이나 주말에 동아리 공연도 열리고, 친구와 연인들이 옹기종기 앉아 담소를 나누고 데이트하는 인기 장소이지만, 가을로 들어서면 스산한 바다 바람과 안개, 그리고 밤에는 급강하하는 기온 탓에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다. 그러나 피교수는 길을 돌아서라도 이 야외극장에  꼭 들르다.


석조 객석 중앙의 같은 자리에 늘 혜린이가 앉아있다. 물론 그도 자리를 비울 때가 있겠지만 적어도 피교수가 찾을 때에는 그는 언제나 그곳에 있다. 늦겨울 한기가 느껴지는 3월, 벚꽃 잎이 날리는 5월,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땡볕의 방학 중에도, 혜린이는 지금처럼 그곳에 앉아있었다. 사실 피교수는 이 묘한 학생의 이름을 모른다. 언젠가부터 그를 혜린이라고 불렀는데, 슈바빙의 안개와 가스등을 사랑했던 작가 전혜린의 모습이 그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차가운 바람에 몸을 웅크리고 발걸음을 재촉해 이곳을 찾은 피교수는 객석에 허리를 꼿꼿이 펴고 홀로 앉아있는 반가운 뒷모습을 발견하고 호흡을 고른 후에 말을 건다.


“어이 혜린이!”


피교수에게 혜린과의 만남은 어느덧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이자 연극이 되었다. 무대에 처음 서는 초보 배우처럼 그는 긴장 반 설렘 반으로 늘 이 과장된 첫 대사를 던진다. 소심한 그는 이 인사를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혼자 여러 가지로 연습해보곤 했다. 반갑게, 힘차게, 다정하게, 놀랍게, 우연히, 진지하게…. 어떻게 연습을 해도 그 대사는 고함만 지르는 서툰 희극배우처럼 튀어나왔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매일 이곳을 찾아야만 하는 필연성, 그러나 그 이유와 목적을 본인도 알지 못하는 괴리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누군가를 애달프게 찾아 헤매지만 늘 엇갈려 지나가는… 몇 번이고 그 꿈으로 돌아가 마침내 그 사람을 만났지만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울리는 그가 누구인지 기억하기도 전에 깨어나버린… 피교수에게 이 장소, 이 만남은 그런 꿈과 같았다.


그는 서툰 대사에 이어 주뼛주뼛 혜린의 옆 자리에 가서 앉는다. 늘 그렇듯이… 또 늘 그렇듯이… 혜린의 무릎 위에는 두툼한 책이 펼쳐져 있다. 손을 비비며 피교수의 어색한 대사가 이어진다.


“야 바람이 벌써 차네. 혜린이 안 추워?


“훗 혜린 학생은 여기 없는데요?”


그러면서도 혜린이가 아닌 혜린이는 피교수가 혜린이라 부르는 것이 그다지 싫지 않은 듯한 눈치였다.


“그럼 진짜 이름을 말해주던가.”


“음… 저 혜린이 할래요 그냥.”


“그래, 혜린이 맞잖아.”

혜린이는 미소를 지으며, 시선은 바다 쪽을 응시하고 있다. 피교수는 혜린의 책을 가리키며 묻는다.


“그래 오늘은 얼마나 썼어?”


훗  보여드려요?


응.


혜린은 책장을 넘기며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책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


“오호. 야 난 여기가 좋은데? 이 표현 아주 기발해.”


“근데요 교수님, 왜 제가 뭔가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읽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읽는 것이면 글이 쓰여있어야지.”


“쓰는 것이라면 펜이 있어야지요.”


“아냐, 펜 없어도 쓸 수 있지. 하얀 백지. 무한한 가능성. 캬 좋다! 야, 미래엔 말야, 사람들이 펜 없이 그냥 이 손가락으로 이렇게 이렇게 글씨를 자유자재로 쓰게 될걸? 그림도 막 그렸다 지웠다 하고 말야.”


우리 교수님은 몽상가예요.”


혜린이 모처럼 활짝 웃는다. 피교수는 기분이 좋아져 함께 웃으며 혜린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바다 쪽으로 눈을 돌린다. 자욱한 바다 안개는 가스등의 오렌지 빛을 부드럽게 반사하고 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몽상의 배를 함께 탄 것처럼 그들은 그렇게 나란히, 말없이 앉아있다.

피교수는 침묵을 깨는 헛기침 후에 느릿느릿 동희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혜린은 말없이 듣고 있다.


"혜린이는 이런 경험 없어? 돌아올 수 없는 곳에 있는 사람이 찾아와 말을 거는 그런?"


"있죠."


"있어? 근데 안 무서워?"


"아뇨. 슬퍼요."


"슬퍼?"


"저 안개 같잖아요. 보이지만 만질 수도 없고, 손으로 움켜줘도 잠시 습기만 느껴지다가 말라 사라지니까..."


"난 불편하고 무서운데... 슬프다니..."


"그저 바랄 뿐이죠. 그가 사라지지 않도록, 달아나지 않도록, 밤이 길기를 기도하며... 이렇게 바라볼 뿐이죠."


"슬프네... 혜린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나 보군..."


흠칫 놀란 혜린은 피교수를 힐끗 본다. 그의 얼굴에는 아직 그늘이 드리워있다. 혜린은 피교수의 옆구리를 가볍게 찌른다.


“오늘은 재밌는 얘기 안 해주세요?”


“아, 좋지! 음, 최불암 영어수업 해볼까?


 맨날 그거.”


"I'm sorry."


“나는 쏘리입니다.”


“Yes, I can.”


“네, 저는 깡통입니다.”


“I can understand.”


“나는 물구나무서기를 할 수 있다.”


“대단한데? 흠 요건 모를 거다. Great!”


“에?”


그래, 먹어라!”


“그레~ 잇… 훗~.”


보조개를 보이며 웃는 혜린이의 해쓱한 얼굴을 보며 피교수는 마음이 아팠다. 안갯속 혜린이가 얼핏 흐릿하게 보였다. 피교수는 가슴이 쩌릿하며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근데 혜린아. 넌 여기 계속 있을 거지? 내 말은… 어느 날 안개처럼 휙 사라지는 건 아니지?”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또 모르죠.”


혜린이가 픽 웃으며 피교수의 어깨를 툭 친다.


“안심이네 그럼. 여긴 바람의 방향이 절대 바뀌지 않거든. 늘 몰려오는 저 안개처럼.”


“교수님은요?”


“응?”


“만일,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안 바뀐다니까. 여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하지만 바람은 제법 세다. 그렇게 입고 있음 감기 걸려.”


피교수는 머플러를 풀러 혜린의 휑한 목에 감아주며 말했다.


"이거 빌려주는 거다. 아주 소중한 거야. 절대 잃어버리면 안 돼. 하하.”


피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세요?"


"맹조교를 만나기로 했는데 늦었네. 자 전혜린 씨 글 잘 쓰시고, 아님 잘 읽으시고. 굿나잇 앤 굿모닝!"


피교수는 손을 흔들고 돌아서 이내 멀어졌다. 혜린의 눈에는 안개가 방울이 되어 맺혀 있다. 그 방울은 눈물처럼 조금씩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혜린은 계속 바다를 응시하며 손으로 눈가의 물기를 모아 바다 쪽으로 손바닥을 펴 후~ 하고 분다.


"돌아가... 사라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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