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교수는 야외극장을 떠나 문과대 앞 분수대에 발걸음이 닿았다. 이 분수는 언젠가부터 물이 흐르지 않았다. 말라버린 분수 안에는 이끼가 조금씩 자라더니 이제는 넝쿨과 잡초가 제집인 양 무성하게 자라다가 그마저 모두 시들어버려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몇몇 학생들이 지나가면서 목례를 하고 깔깔거리며 안갯속으로 사라진다. 피교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잠시 분수가에 걸터앉았다. 안개가 너무 짙어서인지 평소에 말랐던 분수 바닥에 물이 고여있고, 작은 물아지랑이가 올라오고 있었다. 피교수의손에 습기가 맺혔다.
혜린의 말대로 멀리서 바라만 보기에는 불편한 미결감이그를 괴롭혔다. 4년 전 나타났던 김재현 학생은 행방이 묘연했다. 졸업기록도 없었다. 역시 그에 대해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마지막 흔적은 기차역이었다. 4년 전 눈이 엄청 왔던 겨울에 누군가가 그를 기차역에서 봤다는 것이다. 서울로 누나를 찾으러 간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피교수는 손가락을 비비며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김재현의 모습을 떠올려 보려 애를 썼다. 기억나는 것은 딱 두 번이었다. 회의에 늦어 급하게 연구실 문을 열고 나가는데 마침 그 앞을 지나치던 재현이와 부딪힐 뻔했다. 피교수는 미안하다고 했고 자기를 만나러 왔냐고 물었었다, 그 친구는 고개를 저으며 목례를 하고 총총히 사라졌었다. 그런데 다음 날 또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그의 몸이 문에 쿵 하고 부딪혔다. 피교수는 미안하다며 어째 문을 열 때마다 네가 거기 있냐고 농담했고, 그는 씨익 웃고는 가버렸다. 그 해맑은 웃음은 기억나는데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흐릿한 얼굴과 까만 야상 차림의 뒷모습. 문에 부딪힌 때문인지 원래 그런 건지 약간 절던 한쪽 다리. 어 저 녀석 누구랑 닮았는데…라는 짧은 궁금증이 그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다. 동희와의 만남 이후 그 기억들을 여러 번 돌려보며 그는 이제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머리로 추론했지만 이제는 마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동성이었을 것이다. 동성이가 재현이로 돌아왔고 재현이가 동희고 동성이겠지….
어제는 맹조교가 동문회에 가서 임성빈의 소식을 반드시 알아오겠다고 호언장담했었다. 마지막 연결 고리인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맹조교에게 듣기 위해 피교수는 발걸음을 재촉해 상과대 뒤에 있는 문과대로 향했다. 상과대의 위용에 일조권을 침해당해 늘 그늘 속에 있는 문과대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안에서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오는 맹정환 조교와 부딪혔다. 그는 제풀에 꼬꾸라져 계단 다섯 개를 굴러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맹조교! 괜찮아?”
“아악! 오지 마!”
“나야 나. 안 다쳤어?”
“저 살아있는 거 맞죠?”
“살아있지 그럼. 대체 무슨 일이야?”
맹조교는 싸움판에서 도망 나온 사람처럼 꼴이 엉망이었다. 곱슬머리는 더 헝클어져 있었고, 와이셔츠 칼라는 구겨지고 바지는 찢어져 있었다. 부들부들 떠는 온몸은 물과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그의 눈은 겁에 잔뜩 질려있었다. 피교수는 맹조교를 가까운 벤치로 데려가 앉혔다. 그는 왼쪽 엄지두덩을 꽉 깨물고 있었다. 그는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뭔가 깊이 생각할 때 엄지 밑 볼살을 깨물곤 한다. 과거에는 몇 번 그의 유아적인 행동을 놀리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가 몸과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물고 있던 손을 놓고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고 코를 몇 번 푼 그는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는 수업을 마치고 내 방에 돌아와 책을 몇 줄 읽다가 졸았다고 한다. 지난 두 주간 마음이 심란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임성빈을 찾느라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느라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자기도 모르게 책상에 얼굴을 박고 잠들었는데 갑자기 가위에 눌려 눈이 떠졌다. 정신은 점점 맑아오는데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허 이게 뭐지 하며 몸을 움직여 보려고 용을 쓰고 있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돌아온 줄로 알고 자다가 들키면 정말 꼴불견이다 싶어 온몸에 힘을 주었지만 식은땀만 줄줄 흐를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분명 누군가 등 뒤에 있었다고 했다. 고개를 책상에 처박고 있는 자세라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지만, 작은 발소리와 숨소리가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맹조교는 방에 들어온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성동희인가? 그때 발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숨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숨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누군가 바로 그의 뒤에 서서 얼굴을 그에게 갖다 대는 것처럼 불쾌하게 가까운 숨소리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함과 공포가 밀려왔는데, 동시에 누군가 해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가위를 풀려면 온몸에 힘을 주지 말고 똥꼬에만 힘을 주고 욕을 막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쥐가 날 정도로 그곳에 힘을 주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성동희개새끼야!” 신기하게도 그 순간 몸이 풀려나고 그는 힘을 줬던 추진력으로 벌떡 일어났다. 부리나케 뒤로 돌아섰는데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복도로 얼른 뛰어나가 봤지만 그곳에도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그 상황에 특정 부분에 힘이 주어지던가? 대단하군.”
맹조교는 이 와중에도 피교수의 말을 끊고, 교수님은 경청하는 자세가 부족하다며 얘기가 끝난 게 아니니 더 들으라고 나무랐다.
맹조교는 식은땀을 씻고 정신도 차릴 겸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를 하려는 데 아까 그곳에 힘을 너무 줬던 탓인지 갑자기 배가 쌀쌀 아팠다. 그는 씻기 전에 일을 먼저 보기로 하고 빈칸을 찾아 들어가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왼쪽 옆 칸에 밑으로 누군가의 구두 끝이 보였다. 그 칸은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안에 아무도 없었던 것 같았는데 말이다. 맹조교는 그저 잘 못 봤겠거니 생각하고 당면한 과제에 집중했다. 작업 시간이 길어지고 그는 내공을 모아 힘을 주며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묘한 메아리가 울렸다. 이상하다 싶어 다시 기침 소리를 내보았는데 또 뒤에 메아리 소리 같은 것이 따라왔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접힌 다리가 저려 앞으로 오른쪽 다리를 옮기는데 저벅 옆 칸에서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옆 칸의 구두 끝이 앞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맹조교는 머리칼이 주뼛 섰다. 뭐지? 칸막이가 뚫린 아래쪽으로 머리를 살짝 숙여보는데, 옆 칸에도 머리를 숙인 그림자가 얼핏 보였다. 섬찟한 기분에 더 이상의 쾌변이 불가능해진 그는 대충 마무리를 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는데 그 옆 칸은 여전히 반쯤 열려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그는 안경을 벗고 세면대에서 비누를 문질러 손을 씻고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푸푸 소리를 내며 세수를 하고 있는데 느낌이 이상해서 거품 묻은 눈으로 흘깃 보니 옆 세면대에는 아무도 없다. 맹조교는 세수를 할 때 유난히 푸푸 소리를 크게 내는데 그래야 비누 거품도 많이 나고 제대로 세수를 한 것처럼 시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특유의 소리가 어디선가 메아리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맹조교는 부들거리는 몸에 힘을 주며 세면대에 머리를 푹 박은 채 더 크게 푸푸 소리를 내며 얼굴에 물을 뿌렸다.
푸푸... 푸푸...
치익,.. 치익...
코 푸는 타이밍까지 따라 하는 그 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들어 눈앞의 거울을 봤다. 안경을 쓰고 봐도 거울에 비친 모습은 자기 혼자 뿐이었다. 다시 들리는 푸푸 소리... 그는 반사적으로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없었다.그런데...
발밑이 서늘하고 꿀쩍거려 바닥을 보니 물보다 진한 검은 액체가 흥건히 고여있다. 그 가운데서 많이 보던 구두가 둥실 떠오르고, 푸푸 소리와 함께 그 위로 시커먼 물기둥이 솟아올라와 순식간에 인간의 다리와 몸통이 생겨났다. 먹물 같은 덩어리들이 촉수처럼 안에서 튀어나와 다리와 몸통을 감싸며 검은 바지와 상의로 변한다. 퉁퉁 불어있는 몸통과 코끼리 같은 다리, 그 기괴한 모습은 마치 물에서 갓 걸어 나온 시체 같았다. 팔이 없는 상체 덩어리는 앞으로 넘어져 맹조교가 세수하던 자세 그대로 세면대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검은 촉수들이 목에서 뻗어 나와 젤리 같은 머리통을 휘감으며뽀글머리털이 되었고 바람 빠진 푸푸 소리를 내며 그 머리는 맹조교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것은 마치 퉁퉁 불은 미더덕처럼 생겼는데, 눈동자가 있어야 할 곳엔 아무것도 없고 어두운 터널 같은 시커먼 구멍만 보였다. 맹조교는 놀라 입을 벌렸다. 스윽몸을 일으켜 마주 선 그도 따라서 입을 벌렸다. 그 입 속에는 혀도, 치아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 입은 가슴까지 쩍 벌어졌고 그 속의 새까만 심연은 한기를 내뿜으며 맹조교를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으악!!!"
맹조교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갔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자신의 비명 소리를 뒤통수로 들으며 필사적으로 그 괴물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건물 밖으로 뛰어나오다가 피교수와 부딪혀 나뒹군 것이다. 맹조교는 세수를 하듯 얼굴을 감싼 채로 웅얼거렸다.
“교수님, 전 이제 죽은 목숨입니더.”
“왜?”
“아 답답하시긴! 영문학자가 그걸 모르십니까?!”
“모르겠는데. 이 와중에도 나를 혼내는 건가?”
이때 누군가 맹조교의 어깨를 잡았다. 맹조교는 놀라 비명도 못 지르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손을 버둥거렸다. 피교수가 손의 주인을 향해 말을 건넸다.
“누구신지?”
어떤 학생이 맹조교의 안경을 들고 서있었다.
“이 분이 이거 떨어뜨리고 가서요. 저기 이 안경 주인 맞죠?”
“맹조교, 숨 쉬어도 돼. 사람이네.”
맹조교는 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몸을 홱 돌려 기겁을 한 학생의 멱살을 쥐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맹조교는 학생의 멱살을 당겨 코가 거의 서로 닿을 정도로 그를 뚫어져라 노려본다. 피교수는 뭔가 거들어야겠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아 아무 말이나 던진다.
“안경을 쓰고 보지 그러나.”
“누구냐 넌?”
“저요? 근데 왜 반말입니까?”
“너 그 놈이지? 화장실에 있었지?”
“뭐?”
“네가 그놈 맞지? 옆 칸에서 장난치고 내 옆에서 세수했지?”
“무슨 말이야? 이거 안 놔!”
“닥쳐라! 넌 그놈이야!! 내 안경 어디서 났어?”
“그쪽이 달려오다가 나랑 부딪혔잖아. 복도에서!”
“내가? 그래서?”
“둘 다 나뒹굴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까 아무도 없고 안경이 바닥이 떨어져 있었다고…”
“염병, 그래서 갖다 주러 날 찾아오셨다? 난 줄 어떻게 알고? 번개처럼 사라졌다면서?”
“그 뽀글 머리로 날 들이받았잖아. 맞네, 이 꼬랑내. 근데 이거 안 놔?”
“아니야, 너라고 말해 이 새끼야. 내 옆에서 세수하던 놈이 내가 아니라 제발 너라고 말하라…”
피교수가 안 되겠다 싶어 두 사람을 말리기 위해 사이에 끼어드는 순간 그 학생은 멱살을 뿌리치고 맹조교를 밀쳐낸다. 맹조교는 피교수를 덮치며 두 사람이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학생은 안경을 그에게 던지고 버럭 화를 냈다.
“이 새끼가 미쳤나! 야 너 몇 학번이야? 나 78이야 새꺄. 사람을 밀쳤으면 사과를 하거나, 안경을 돌려줬으면 감사를 하거나 할 일이지. 이 또라이 같은 새끼가 죽으려고….”
맹조교는 심봉사처럼 앞을 휘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학생은 한심하다는 듯이 침을 칵 뱉고 총총히 자리를 뜬다. 피교수와 맹조교는 안경을 챙겨 서로를 부축하며 아까 앉았던 벤치로 돌아와 나란히 앉는다. 피교수와 맹조교는 동시에 안경을 쓰고 다시 같은 자세로 돌아간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피교수가 한 마디 한다.
“안경이 바뀐 거 같은데.”
“아 네…”
두 사람은 안경을 바꿔 낀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피교수가 넋두리처럼 한 마디 던진다.
“사람은 역시 겉만 보곤 알 수가 없나 봐. 얌전해 보이는 학생인데 저리 포악하다니.”
“근데 왜 저 보고 맹교수라고 하셨습니꺼?”
안 그랬으면 그 학생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였을 것이라고는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교수 맞잖나. 강의도 하고 있고…”
“뭐… 그렇긴 하지만…”
“그나저나 맹교수 오늘 한턱내야겠네.”
“와요?”
“자네를 한참 후배로 본 거 같던데 그 친구가? 자네 73학번이잖아.”
“쳇 그놈 눈이 삤나 보죠….”
맹조교는 입술을 씰룩였다. 흥분이 가라앉자 두 사람은 부조리극 같은 해프닝 이면에 엉킨 실타래 같은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말을 멈췄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몇 번 앞을 지나간 후에야 맹조교가 입을 열었다.
“근데 제가 본 게 대체 뭡니꺼?”
“웰컴 투 마이 월드….”
“그기 나였는데, 퉁퉁 불었어도 내 구두에, 내 양복에, 내 얼굴… 아이고 우야꼬… 난 이제 죽은 목숨인가? 아 자기 모습을 보면 곧 죽는다 안캅니까…”
“도플갱어 말하는 건가?”
“’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도 딱 그 얘기 아입니꺼? 결국 자기 칼에 찔려 죽은…”
“그건 좀 건너뛴 해석이지 않아? 도리안의 초상은 자기 욕망의 표상이었고…”
“그러니까 제가 더 비참하지요. 도리안은 18년 동안 늙지도 않고 방탕하게 살다가 지 죗값으로 그림이 그렇게 쪼그라들었지만, 책만 파고 살아온 지는 뭡니꺼? 내가 뭔 죄를 지었다고 눈과 입에 시커먼 구멍이 뚫린… 그 물귀신 같은 몰골이 뭐냔 말 입니더."
“음… 그건 뭐 일종의 상징 아닐까? 그 심연의 눈과 입은 아직 다 보지 못하고, 다 말하지 못한 미래가 감추고 있는 우리 인생의 신비랄까…?”
“교수님 지금 강의하십니까? 그기 위로가 됩니꺼?”
“하하. 12년째 귀신이 들러붙은 내가 자네를 위로할 처지인가 어디?
“이기 다 교수님 때문입니더. 이상한 소릴 해 쌌더니….”
맹조교는 안경을 벗어 닦다가 엄지 볼살을 물고 멍하니 굳어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피교수는 섭섭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맹조교의 비난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헛것을 본 것이라고 쉽게 위로할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 아닌가. 저 밀려드는 안갯속에는 발을 디딜 수 있는 단단한 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 안개 너머에서 동희와 맹조교의 도플갱어는 나란히 손을 잡고 우리에게 손짓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맹조교는 얼음땡을 풀고 안경을 다시 썼다. 이번엔 피교수가 안경을 벗어 닦으며 말을 건넸다.
“맹조교 근데, 임성빈은...”
“아, 임성빈이…. 그게…”
“왜? 아무도 모르던가?”
“그게 아이라… 그 재용이 자식 때문에…”
“재용이? 누구지?”
“아 교수님, 모르십니꺼? 우리 학번 젤 잘 나가던 스타 아입니까 스타!”
“아 그래? 스타면 킹카인가?”
“킹카는커녕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놈이 돈만 많아가지고, 에이, 그놈이 얼마나 이기적이냐 하면요, 학교 다닐 때 그 흔한 데모 한번 안 하고 지 앞가림만 하던 놈입니더. 우리는 응? 동맹 휴업하고 시험 거부하고 있는데, 지 혼자 떡 하니 강의실 들어가서 출석하고, 혼자 시험 다 보고… 그럼 뭐 해 내가 더 공부는 잘했는데….”
“근데 걔가 왜?”
“아 그 자식이 동문회에 떡 나타났는데, 미국 유학 중이라는 깁니다. 석사 마치고 벌써 박사과정 디펜스 마쳤다는데...”
“호 빠른데.”
“아 갸는 돈 써서 군대도 안 갔거든요!”
“능력자로구만. 근데 걔가 왜?”
“아, 이 자식이 처음부터 계속 잘난 체 하는 겁니다. 뭐 동문회 술값을 지가 다 내겠다느니, 미국 가서 벤츠를 뽑았다느니, 거기 교수들이 서로 자기 지도교수 해주겠다고 했다느니, 간만에 한국 오니까 사람들 머리가 다 까매서 촌스럽다느니…”
“하하~ 스타 맞구만.”
“웃지 마이소! 교수님 때문에 제가 아주 개망신 했습니더!”
“또 나 때문이야? 왜?”
“제가 미션 완수를 하려고 옆에 몇몇 애들한테 니들 임성빈 기억나냐 했더니 다들 갸웃하길래, 아니 걔가 시커먼 옷 잠바 때기 걸치고 다녀서 별명이 까망귀신이었다 이러는데… 아 이 재용이 새끼가 갑자기 절 돌아보더니 깔깔 웃으면서 이러는 거예요. ‘까망귀신 여기 있네. 네가 까망귀신이었잖아.'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쳐다보는데 이 자식이 계속 손가락질하면서, ‘얘들아 정환이 까망귀신 맞지? 학생 때랑 똑같다. 얼굴도 시커멓고, 안경도 시커멓고, 옷도 시커멓고. 너 학교에 10년째 있다며? 네가 우리 학교 지박령이다 야.”
“까망귀신이 자네 별명이었어?”
“아 교수님! 미쳤습니까!?”
“미안. 그래서?”
“너무 화가 나서 뭐라고 받아치려고 했는데, 웬일인지 몸에 힘이 탁 풀리는 겁니다. 애들이 절 보고 다 같이 깔깔 웃으면서 건배타임으로 넘어가는데, 제가 돌았는지 저도 같이 웃어넘겨 버렸습니더… 제가 왜 웃었을까요? 그놈을 한 대 쳐도 시원치 않았을 텐데, 제가 왜 바보같이 웃고 넘어갔을까요?”
“돌대가리를 때려봐야 자네 손만 아팠을 거야.”
“재용이 모르신다면서요?”
“모르지. 근데 맹조교가 그 학번 탑이었던 건 알지.”
“그쵸! 흐흐. 역시 우리 교수님!”
“그러니까 빨리 논문 마무리 하자구.”
“근데... 솔직히 무섭심더. 논문을 못 끝낼까 봐도 무섭고, 논문을 끝내도 무섭심더. 아니 박사를 딴다 해도 유학도 못 갔다 온 제가 재용이 같은 놈들이 수두룩 빽빽인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꺼? 해봐야 보따리 장사밖에 더 하겠습니꺼?...”
“기운 내게. 자네는 이미 학과장 아닌가?”
“교수님! 농칠 때가 아입니더. 울 부모님은 농사에 허리가 휘면서도 제가 교수될 날만 기다린다 아입니꺼… 벌써 동네 어르신들은 제가 내려가면 우리 정환이 개천에서 용 났데이 그러시는데… 그 눈알도 없고 혀도 없는 그 시커멓게 구멍 난 얼굴이 꼭 제 운명인 거 같아서… 전 무섭심더… 귀신도 무섭지만, 전 제 앞날이 더 무섭심더… 성빈이나 지나 뭐가 다릅니꺼. 재용이 같은 놈들 눈에는 다 똑같은 까망귀신일 낀데…”
맹조교는 속내를 털어놓을수록 사투리가 더 심해졌다. 개천에서 용 났다… 비범한 개인의 비범한 성공을 칭송하는 이 표현만큼 역설적으로 이 사회의 고질적인 배타성을 잔인하게 드러내는 표현은 찾기 힘들 것이다. 더러운 개천에서 용이 나와 승천한다는 것은 그 용이 이미 돌연변이 같은 기형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고, 이미 저 높은 하늘을 독점하고 있는 자들에게 개천에서 난 용은 결국 조롱거리요 넌 결코 우리와 같을 수 없다는 선긋기일 뿐 아닌가. 문득 4백 년 전 영국에서 로버트 그린이라는 시인이 셰익스피어를 ‘건방진 까마귀 (upstart crow)’라고 조롱했던 글이 떠올랐다. 그는 셰익스피어가 배우의 가죽을 덮어쓰고 시인들의 아름다운 깃털로 치장했다고 비웃었다. 캠브리지와 옥스퍼드 출신인 인텔리 시인들의 눈에는 무식한 연극쟁이가 감히 시를 쓰겠다고 깝죽대는 꼴이 개천에서 기어올라온 이무기처럼 보였을 것이다. 백조 틈에 낀 까마귀 취급을 받은 셰익스피어는 술 취한 어두운 밤길에서 어떤 까망귀신을 만났을까? 햄릿의 망령이나 맥베스의 마녀는 그 두려움의 흔적이 아니었을까? 그가 그랬을진대… 또, 승천한 한 마리의 용 뒤에는 개천에서 날아오르지 못한 얼마나 많은 이무기들의 눈물이 있는가? 시대를 막론하고 이들의 도플갱어는 뻥 뚫린 동굴 같은 눈과 무덤 같은 입을 벌리고 어두운 영혼의 뒷골목에 숨어 두려움과 불안에 쫓기는 자신의 본체를 집어삼키기 위해 노리고 있는 것이다.
피교수는 맹조교가 만난 그 구멍 난 도플갱어가 자신에게도 곧 찾아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동희를 통해 이미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마른눈과 창백한 입술의 뚜껑을 열면 그 어두운 구멍 속에서 자신의 어떤 모습을 마주 보게 될 것인가? 맹조교에게 위로의 말을 꺼내려했던 그의 의도와 다르게 그의 입은 점점 무겁게 닫혔다. 두 사람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었다. 밤은 깊어가고 안개 너머 밤하늘에는 달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창백한 달빛은 오렌지 가스등과 만나 결이 다른 이질적인 그림자들을 땅 위에 드리우고 있었다. 피교수는 넌지시 말을 걸었다.
“내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까?”
“해 보이소.”
“전방 철책에 배치된 어떤 신병이 있었는데 말야. 이 친구가 구강구조가 특이해서 '아' 발음을 못했거든. 첫날밤에 암구호를 열심히 외워서 보초 교대하러 갔는데 초소에서 ‘강원도!’ 이러더래. 그래서 자신 있게 ‘고구미’ 그랬는데,
“결국 총 맞고 쓰러지면서 ‘젠장 김진기?’ 이거요?
“오 이걸 아네.”
“그기 그기 언제 적 농담인교… 교수님 그런 농담 수업 시간에 일절 하지 마이소. 아들 뒤로 넘어갑니데이.”
“그래 알았어.”
“설마 최불암 시리즈 이런 건 안 하셨죠?”
“응? 그것도 안 돼?”
“하이고 마… 우리 교수님 내 없음 우짤꼬.”
너스레를 떨며 맹조교의 축 늘어졌던 어깨가 조금 올라왔다. 피교수는 어떤 영화에서 본 것처럼 이 타이밍에 어깨를 두드려줘야겠다고 결심하고 손을 뻗는 순간, 맹조교가 힘차게 일어섰다.
“에이 내려가입시더.”
피교수의 목표 잃은 손이 허공을 저었다. 피교수는 헛헛하게 손으로 바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시각 맹조교가 뛰쳐나온 화장실 세면대에서는수도꼭지에서 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 들어와 맹조교가 있던 칸으로 들어간다. 바닥에는 검은 액체가 스멀스멀새어 나오고 있고 반쯤 열려 있던 옆 칸의 화장실 문이 소리 없이 조용히 닫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