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과 한국 교회(26)

진보하지 못한 한국 교회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

by 조작가Join

뇌와 신앙


영화 《데몰리션 맨》을 보면 정치 지도자가 악당을 냉동고에서 꺼내 활용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악당은 지도자를 향해 총을 겨누지만,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뇌가 그렇게 조작된 것이다. 『시계태엽 오렌지』에서도 불량 학생들의 뇌를 조작해서 불건전한 말을 하고 생각할 경우 고통스럽도록 조작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그의 작품 『뇌』를 통해서 ‘뇌 가소성’과 관련해서 픽션으로 보여주었는데, 실재임이 밝혀졌다. 사실, SF소설은 ‘신’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의 몰락을 설명한다. 아니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과 다른 신을 창조한다.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올가 토카르축은 『태고의 시간』들에서 기독교가 말하는 신과 전혀 다른 신을 창조해 냈다.


과거에 뇌 과학은 미지의 분야였다. 인간 뇌의 복잡하고 다양함을 과학과 의학이 분석해 낸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현대 과학과 의학은 이 부분을 현실화시키고 있다. 최근에는 뇌를 분석해서 인간의 성격까지도 설명하기도 한다. 인간의 모든 특성은 뇌와 연관돼 있다고 주장하고 정도에 따라 개인 차이가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물론, 아직 까지는 더 많은 부분이 연구돼야 하고, 검증할 부분들이 많지만, 현재 과학발전의 속도라면, 뇌에서 작용하는 호르몬과 다양한 요소들의 연결로 파생하는 인간의 행동 대부분까지 디지털화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즉, 인간의 모든 행동이나 생각을 코드화 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를 지닌 인간이 아니라, 그저 0과 1로 해석하고 조작할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하게 된다. 인간을 프로그램화할 수 있다는 의미여서 소설과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인간 개조 이야기가 현실에서도 가능하다.


과거, 인간의 마음은 심장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현재는 인간의 마음은 뇌에 있으며, 유전자 조작이 가능할 수 있음을 밝혀냈다.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특히, 미신에 가까운 창조과학을 신봉하는 자들은 이 부분을 어떻게 반격할 것인가? 그저 뇌는 자연적으로 생성되기 힘든 구조이기에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주장하면서 우격다짐을 할 것인가? 이런 모습은 코로나 시대 기독교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과학으로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이 ‘난센스’이다. 성경이 과학적이었다면, 왜 특별 계시와 같은 기적을 믿는가? 노아의 방주는 과학적으로 따져보려고 하는 신학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오병이어’는 과학적으로 검증하려고 하지 않는다. 성경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싶다면, 창세기뿐만 아니라 신약도 따져봐야 하는데, 창조과학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합성어는 -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고 과학은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실험으로 검증하는 것이니 - 말도 안 되는 합성어다. 기독교가 주술적 수준의 과학을 신봉하고 – 이미, 아니라고 검증된 - 새로운 과학발전에 대한 이해를 멈추고 보수적 과학관을 고수한다면, 기독교는 토템 수준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뇌 과학의 발전은 인간 신앙에 큰 장애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종교성도 뇌의 특정한 부분과 연계된 것이며, 호르몬과 관련이 있음을 곧 분석해 낼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내 마음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뇌의 구조로 인한 것이라니?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열정도 특정 호르몬에 의한 것이라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믿음이 생기고 신앙적으로 성숙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착각이다. ‘나’라는 개인이 본래 유전적으로 그렇게 종교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유전자 조작을 통해 개인의 신앙심 따위는 순식간에 소멸시킬 수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공상 과학 영화 같은 이야기 같지만,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베르나르는 그의 소설『신』에서 신은 다중우주 속에서 진화론적으로 우주를 발전시키는 존재로 설정했다.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전지전능한 신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전지전능이라는 표현도 세부적으로 따져보면 틀린 말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전지전능하지 못한 하나님을 포기할 수 없다. 필자가 말하는 전지전능하지 못한 하나님에 대한 의미는 보수 기독교에서 말하는(대체로 한국 기독교) 하나님이다. 우스갯소리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아무리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도 못하는 게 있다는 것이다. 죄를 짓지도 못하고 거짓말도 못 한다. 그리고 구약 욥기에서 등장하는 신은 사탄의 시험에서 인간을 해방하지도 못했다.


욥기서는 오히려 사탄이 하자는 대로 욥을 고통에 빠지게 한다. 이런 부분을 교회에서는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으로 해석한다. 틀린 해석은 아니다. 신의 영역을 인간이 다 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리는 자승자박이 될 수 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인도해 주실 거다.’라는 신앙적 고백은 고백 자가 잘못된 길로 가도 유효할까? 잘못했을 때 그는 모든 귀책사유를 신에게 돌릴 것이다. 신앙적으로 모순적인 해석을 이제 뇌 과학으로 명쾌하게 해석할 수 있다. ‘당신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당신의 뇌 문제입니다.’라고 말이다.


한국 교회는 뇌 과학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과학은 종교의 시녀였던 시절을 벗어나 이제 종교의 적(敵)이 돼 버린 지 오래다. 과학적 사고로 판단한다면, 종교는 미신이고 망상이니, 인간의 발전을 저해하는 속임수라고 이해할 수 있다. 사실이 아닌 허구를 사실처럼 믿게 만드는 기만행위로 보는 것이다.

뇌 과학은 우리의 인지능력이 모두 조작될 수 있음을 밝혀내고 그 특성이 환경적인 영향 속에서 진화론적으로 발전한 것임을 주장하면서 검증하고 있다.

많은 기독교인이 진화론을 주장하면 “우리의 조상은 원숭이가 아니다!” 정도로 만족하고, 만물의 영장이 된 인간의 우월성을 감정적으로 만끽할 뿐이다. 사실, 진화론적으로 따지면 인간은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진화론적으로 따졌을 때 호모 사피엔스는 20만 년 전에 출현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출현했다고 해서 바로 만물의 영장이 된 것도 아니다. 개미나 바퀴벌레는 인간의 출현과 생존과 비교할 때 생존 기간과 생명력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1억 년 전 공룡만 하더라도 인류의 역사의 몇 배가 되는 기간을 생존했다. 물론, 진화론을 근거로 해서 생물학을 믿는다는 전제하에서 성립하는 내용이다.

진화론을 거부하는 무지한 성도들은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계보를 문자 그대로 믿는데, 대충 그 족보를 따져서 올라가면, BC4000년 정도가 된다. 현재를 기준으로 6000년이 조금 넘는 역사인 셈이다.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믿는 성도가 있다는 게 더 신기할 정도다.


이제 진화론은 인간의 뇌를 분석해서 신앙심도 유전적인 성향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교회는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거나 혹 뇌 과학의 주장에 맞설만한 이론이 없다. 그저 “창조 질서”를 운운하면서 무지함을 드러낼 뿐이다. 과학은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말하는 수준이 되고, 이를 밝혀내려고 하는데, 교회는 여전히 신동설(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운행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 필자)을 중심으로 근거 없는 과거 – 성경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모순적인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과거를 합리화하려 하는 데 - 를 현재에 그대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교회와 유전자학의 발전


유전자 조작 문제는 1990년대 복제 양 돌비 시절부터 논쟁이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돌비 출현이 30년이 넘었는데 유전자와 관련한 발전은 꽤 진행됐을 것이고, 돈이 있는 인간이라면 비밀리에 유전자 조작 시술을 받지 않았을까?

영화 《아일랜드》에서는 복제 인간이 그 원 존재를 위해 부속처럼 이용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2017년 가즈오 이시구로의『나를 보내지 마』에서도 인간을 위한 소모품으로 이용되는 복제 인간을 다루면서 그들 영혼의 유무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그리고 과학은 이러한 내용을 실현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창조과학”, 혹은 “지적설계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과학으로 절대로 밝힐 수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하던 부분들도 양파 껍질이 벗겨지듯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이미, 많은 사람이 현재는 치료할 수 없는 병든 몸을 냉동시켜서 치료 가능한 미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인간의 수명 연장에 대한 욕망은 이미 현재 진행형이다.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고 많은 설교자가 강조하고, 되풀이하고 있지만, 과학과 돈은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게 했고 이제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신’(불사를 의미 한다)의 영역까지 침범하려고 한다. 특이점 주의자 레이 커즈와일은 최초로 불사의 인간이 되기 위해 열심히 실험하고 있다.

“창조의 질서”는 교회의 상징적인 저항 구호에서 이제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소음으로 전락했다. ‘질서’를 강조하느라 ‘사랑’을 포기한 교회는 과학의 무분별한 발전에 반대하는 일반인들에게조차도 설득력을 잃고 조롱당하는 수준이다.


2010년대에 이르러서는 GNR(유전학(Genetics)·나노기술(Nanotechnology)·로봇공학(Robotics))의 기하급수적인 발전을 긍정적으로 보는 ‘특이점 주의자’들이 트랜스 휴먼과 포스트 휴먼을 말하고 있고(영화 《업그레이드》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가 실제로 개발돼, 그동안 치료할 수 없었던 수많은 병과 장애를 치료하고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말했듯이 돌비가 출현하고 나서 30년이 지났다. 과학은 진보했고, 교회는 신동설을 주장하느라 진화론을 애써 무시했는데, 과학은 인간을 신의 위치로 올려놓고 있다. 물론, 여전히 미흡하다. 하지만, 불사의 인류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생사(生死)를 인간이 주관할 수 있다고 하는 건 교회에서 말하는 신과 인간의 경계가 무너짐을 의미한다.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른다는 교회의 징벌적인 개념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물론, 교회는 방어할 수 있는 논리가 있다. 초기 지구 인류는 수백 년을 넘게 살았던 것을 근거로 조금 더 항쟁할 수 있을지 모른다(창세기의 아담, 무드셀라, 노아 등은 900세를 넘게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억지는 더 많은 조롱을 받을 것이고, 교회는 더 한적한 고대의 녹이 슨 유물처럼 남겨질 것이다.


진화론과의 대결에서 교회는 패배한다!


과학 기술과 의학의 발전, 유전자 복제 등은 모두 진화론을 지지한다. 그야말로 ‘팩트’이다. 진실을 발견하는 과정이며 철저한 검증을 거쳐서 인정되기에 결과물에 대해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성경은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서서히 그 본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기록자에 따라, 편집자에 따라, 번역자에 따라 세부적인 내용이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수많은 역사서가 이런 사실을 증명해도 근본주의자들은 믿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 성경을 해석하면서, 한 치 오류도 없는 ‘성경 무오류설’을 자신의 심장에 깊이 새겨 놓고 신앙생활하는 교인들이 여전히 많다. “무오류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좀 더 구체적으로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성경의 편집 과정을 생각해 보고, 역사적으로 공부해 본다면 미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무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신앙생활은 진정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다. 신약에서도 수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랐지만, 그들의 신앙은 배부르면 돌아서는 '배부른 돼지' 신앙이었다. 떡만이 복음이라고 믿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이런 모습은 코로나 19에도 불구하고 광장에 모이려고 혈안 돼 있는 일부 종교인들과 교인, 그리고 가짜 예배를 강조하면서 모이라고 강조하는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동설은 현재 진화론을 부정하는 기독교인도 믿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가톨릭은 1990년대(1992년 10월 31일)에 이르러서 인정했다. 그때까지 거짓으로 밝혀진 천동설을 유효한 교리로 받아들여야 했던 그들의 신앙은 진리의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후 가톨릭이 세상의 다양한 이론을 수용하고 여타 종교와의 교류 모습을 보여주면서부터 사회적 신뢰가 높아졌다. 이런 부분은 한국 기독교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하는 부분이다.

과거 교황 무오류설과 성경 무오류설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가톨릭이 교황에게 준 권위를 개신교는 성경에 부여했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오류는 내포하는 의미의 무오류를 말하는 것이지, 문자의 무오류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데, 한국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그런 상식을 거부한다.

진화론은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진화론은 과학이다. 과학은 가설이 있고, 가설의 검증을 통해 진위를 가린다. 혹 지금은 진실로 여겨진다고 하더라도 이후에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 뉴턴의 과학 법칙은 절대적 진실의 왕좌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뉴턴의 법칙은 과거 세상의 질서를 설명했고, 그 자신 자체가 충실한 기독교인이었기에 과학을 통해 더 깊은 신앙의 길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라는 범신론자가 등장해서 뉴턴 법칙의 한계를 발견하고 상대성 이론을 내어놓았다. 아인슈타인 자체는 신의 존재를 믿었기에 ‘신의 주사위 놀이’를 거부했지만, 이후에 나온 이론들은 아인슈타인이 거부했던 주사위를 아무렇지 않게 던진다.

지금 과학 이론도 언젠가는 또 다른 이론들로 교체될 것이다. 과학의 위대함이자 장점은 자유로운 비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마, 진화론이 계속 발전하다가 종말이 온다면, 과학은 그 종말을 과학적인 사실로 받아들일 것이다. 아울러 과학 이론의 변화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동반한다. 토마스 쿤이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설명한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는 ‘세상을 보는 틀’로 해석할 수 있다. 과학은 신화와 철학의 시대를 벗어나 현재를 읽을 수 있는 가장 객관적인 ‘틀’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기독교는 얼마나 진보된 ‘틀’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 보수적이라고 하더라도 현시대를 제대로 훑을 수 있는 세계관은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닐까?


19세기 이후의 철학은 세상이라는 항아리에 ‘신’ 대신에 ‘이성’이라는 내용물을 채웠다. 그런데, 이성도 실재의 여부를 검증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신을 대신해서 자리를 차지했다면, 전지전능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수준을 기대했는데, 이성은 완벽하지 못했다. 신, 이성으로 세상의 주인이 바뀌었지만, 세상은 완벽해지지 않았다. 혁명은 과거의 것을 붕괴시켰지만, 새로운 것으로 빈자리를 완벽하게 채우지 못했다.


이때 권좌에서 물러난 기독교의 이데올로기는 서구 제국주의와 함께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으로 퍼져나가고, 그곳에서 확장하면서 그 세력을 유지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서구 문명에 내린 것이고, 그 문명의 혜택을 미개한 이방 민족에게 나눠야 한다는 사명감과 그들의 제국주의적인 야망이 동시에 원한 것이다. 이미 유럽에서 밀려난 기독교는 새로운 ‘신’을 찾지 않았고 여전히 진보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기독교를 수용할 새로운 땅을 찾았고, 그 땅에서 번창하기를 바랐다.

개신교가 진화론과 대결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독교는 진보를 고민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후진 곳에서만 번성할 수 있다. 즉, 기독교의 힘이 토착 세력보다 강할 경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이 쇠퇴하면, 기독교는 무의미해졌다. 결국 살기 위한 방법은 진보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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