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있든 ‘숨그네’는 똑같다 ”
『숨그네』상(上) 편 헤르타 뮐러(Herta Muller) (200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2차 세계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사실, 그렇게 끝났으면 평화로운 일상과 재건의 시대가 도래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승리자는 승리자의 횡포를 충분히 부려야만 했다. 그래야 승리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 아래서 고통받는 패자는 승자의 웃음을 당연하다는 듯이 바라봐야 했다.
『숨그네』는 동유럽의 이야기다. 소련이 지배한 동유럽은 전쟁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전범 국가에 동조한 사람들은 수용소로 보냈다. 수용소에서 보낸 5년은 그들에게 5년이라는 시간을 빼앗아 간 게 아니라, 이후 인생마저도 지배했다. 좀처럼 회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뭐가 정상인지도 알지 못한 채 살아야만 했다. 처음에는 가족으로부터 추방이었지만, 후에는 수용소에서 정해진 추방을 당한다.
수용소 시절 이전부터 그 이후에 이르는 이십오 년 동안 나는 공포 속에 살았다. 나라와 가족들에 대한 공포. 나라가 나를 범죄자로 가두고. 가족들이 나를 치욕으로 여겨 내쫓으리라는 이중 추락의 공포였다.
『본문』 중
전쟁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본 작품 이 전과 이후의 노벨 문학상도 전쟁을 다룬다. 가장 선진화된 지역에서 아이러니하게 가장 야만적인 전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야만은 전쟁 이후에도 계속됐다. 전쟁 기간 중 수없이 죽어간 군인과 별개로 민간인들도 그 못지않게 사라졌다. 양차 세계 대전 동안 1억 명이 넘는 사람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그걸로 부족했던가? 승리자는 패배자에게 전쟁의 대가를 요구했다. 그 대가는 또 인간이다. 전쟁 중에는 인간을 죽이기 위한 인간이 필요했고, 이후에는 승리의 대가로 또 인간을 요구한다.
참전 경험이라곤 전혀 없는 우리가 러시아인들에게는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에 책임이 있는 독일인들이었다. 『본문』 중
도대체 누굴 위한 전쟁이었고, 누굴 위한 승리이었을까? 셀 수도 없이 죽어간 인간의 시체를 바로 어제 두고 오늘은 살아있는 자들을 시체로 만들려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숨그네』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배고픈 천사”일 것이다. 그 해석은 ‘배고픔’이다. 그런데, 왜 ‘천사’라는 표현을 덧입혔을까?
우선, 수용소의 배고픈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 체면일 수 있다. 배고픔이 좋은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견디지 못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는 중학교 시절에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열흘 정도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지낸 적이 있다. 정말로 먹을 게 없어서 전기밥솥에 남은 누렇게 굳은 밥을 아껴먹고, 먹다 남은 라면 스프로 국을 끓여 먹었다. 연탄이 없어서 보일러를 돌릴 수 없었고, 전기세가 밀려서 전기도 끊긴 상황이었다. 이 정도 상황이면, 자포자기할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라면 국물에 굳은 밥을 말아먹는데도 맛이 있었고, 추운 겨울에 난방장치가 아무것도 없었지만, 흐릿하게 나오는 TV만으로도 만족했다.
나아질 게 없으면 포기할 수도 있지만, 나아질 수 없기에 그 상황을 그대로 누릴 수도 있다. 수용소에서 5년을 생각해 보자. 인생으로 따지면 아주 긴 기간은 아니지만, 젊은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짧지 않은 기간이다. 혹,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밤마다 스쳐 지나갈 것이다. “배고픈 천사”는 이런 두려움을 이겨 내기 위한 스스로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배고픈 천사가 내 뺨을 그의 턱 위에 끼워 맞춘다. 그리고 내 숨결을 그네 뛰게 한다. 숨그네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심한 착란 상태이다. 나는 느낀다. 배고픔이 우리 위에 올라타는 걸. 우리는 배고픔을 위한 틀이다. 우리 모두 눈을 감고 먹는다. 우리는 밤새 배고픔을 먹인다. 우리는 삽 위에 올라탈 배고픔을 살찌운다. 버티면 좀 낫다고 생각하는가. 너는. 『본문』 중
다음으로 반어법이다. 배고픔은 힘들다. 물론, 어느 정도 배고프다 보면 배고픔이 덜해진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배고픈 천사”는 무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용소 생활은 편하게 누워있는 죄수 생활이 아니라 고된 노동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과거 필자는 일용직 노동자 생활을 잠시 한 적 있다. 공사장에 나가 삽질을 하거나 물건을 나르다가 점심때가 되면, 정말 맛있게 눈치도 보지 않고, 허겁지겁 점심을 먹었다. 손도 더럽고, 얼굴도 더럽고, 밥을 먹는 환경도 청결하지 않지만, 평소보다 더 많이 맛있게 먹었다. 그래도 몇 시간 지나면 또 다른 배고픔이 찾아왔다.
배고픈 천사는 오늘날까지도 내 안에서 말한다. 그가 뭐라고 하든 정확도 높은 공식은 남아 있다.
삽질 1회 = 빵 1그램
배가 고플 때는 배가 고프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허기는 침대틀이 아니다. 침대틀은 셀 수 있다. 배고픔은 객체가 아니다. 『본문』 중
주인공은 음식을 넉넉하게 공급받지 못했다. 단 한 끼도 충분히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우연히 10 루블이 생겼을 때, 모두 음식을 사서 뱃속을 채웠다. 물론, 그 모든 음식은 토사물이 돼 도로 나왔지만.
그래서 “배고픈 천사”는 악마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 타인의 빵을 훔쳐 먹은 사람은 죽도록 맞으면서도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했다. 즉, 배고픔만으로도 도둑질할 수 있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 빵 앞에서는 인간이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
빵의 정당성은 배고픔이 뒤따르지 않는 폭력과는 다른 폭력이다. 빵의 법정에는 일반적인 도덕이 들어설 수 없다. 『본문』 중
남녀가 공존하는 곳에서는 ‘사랑’이 존재한다. 이 사랑은 주로 육체적인 사랑이다. 소설 속에서 사랑은 섹스를 의미한다. 성욕은 남자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만약 작가가 남자였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여자의 성욕을 독자가 인정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여성이다. 그래서 여성의 성욕을 표현했을 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매일 중 노동을 하고, 적은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그런데도 남녀는 사랑을 나눈다. 어떤 힘이 있어서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 정서적인 사랑이라면 역시 정신이 육체를 넘는다고 할 것이지만, 이곳에서의 사랑은 철저히 육체적이다. 배설욕으로 가득한 사랑이다. 물론, 주인공은 이런 사랑 행위도 점점 줄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는 육체적 사랑을 유지한다.
나는 체펠린이란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의 고통스러운 은빛 망각과 고양이처럼 빠른 교미에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체펠린의 사랑도 한때였다. 수용소에서 맞는 두 번째 겨울에 체펠린은 막을 내렸다. 『본문』 중
바르가스 요사의 『판탈레온 대위와 특별봉사대』가 떠오른다. 군인을 위한 특별부대 – 위안부 – 가 조성됐다. 군인은 오로지 남성뿐이다. 충분히 젊고, 좋은 음식을 먹는다. 이들이 섹스를 갈구하는 건 당연하다. 오히려 그렇지 않다면, 거세된 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숨그네』에서의 상황은 섹스가 사치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남녀의 행위를 눈감아 줄 정도로 보편적이다. 종족 번식을 위한 행위도 아님에도 이들의 행위는 멈추지 않는다.
수용소에서 인간은 모두 평등할 거라고 착각할 수 있다. 아니다. 그런 곳일수록 작은 특혜나 지위가 권력이 된다. 작은 권력일지라도 수용소에서는 큰 힘으로 작용한다. 군 시절을 생각해 본다. 몇 개월 선임이 바로 아래 후임에게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을 시킬 수도 있다. 오직 군대여서 가능한 일이다. 단, 몇 개월 앞선 자가 뒤에 있는 자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수용소라는 특별한 공간은 작은 권력만으로도 위대한 인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위대한 인간은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며, 그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고개를 숙인다. 다른 말로 비굴함이지만, 수용소에서 비굴함은 비굴함이 아니다. 비굴해지더라도 조건이 나아진다면, 누구나 그 비굴함을 감내할 것이다.
나는 펜야의 추함에 매료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겉과 속이 뒤바뀐 그녀의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그것은 숭배로 이어졌다. 혐오감을 느꼈다면 무뚝뚝하게 굴었을 테고 저울의 접시 앞에서 위험을 무릅써야 했을 것이다. 나는 굽신거리는 나 자신에게 구역질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그녀가 준 빵을 맛있게 먹고 몇 분간 배를 반만이라도 채운 다음이었다. 『본문』 중
우리는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알고 있다. 죽음 앞에서도 “악법도 법이다.”를 말하고 외상으로 산 닭값을 걱정했던 성인이다. 아니면 40일 동안 금식한 후 사탄의 시험을 극복한 예수도 있다. 그들은 죽음이나 삶의 욕망을 이겨 내고 묵묵히 본인의 신념을 지킨 성인(聖人)이다. 아니면, 그보다 좀 더 인간적인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라고 단언한 존 스튜어트 밀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배고픔과 추위, 죽음이 늘 서성거리는 현실이 계속된다면, 이들도 거추장스러운 신념을 버리지 않았을까?
죽은 사람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전리품만 보인다. 시체를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것은 악의적인 행동이 아니다. 입장이 바뀐다면 죽은 사람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수용소는 실용적인 세계다. 수치심과 두려움은 사치다. 흔들림 없이, 어설픈 만족감으로 시체를 처리한다.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감정과는 다르다. 죽은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줄어들수록 삶에 더 악착같이 매달리게 되는듯하다. 그만큼 착각은 더 심해진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다른 수용소로 간 거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사실은 효력이 없다. 사람들은 그 반대를 믿는다. 『본문』 중
어디서도 환영받기 힘든 주인공의 시각으로 본 전후의 모습이다. 수용소, 그리고 이후의 모습은 어느 쪽이 더 나아 보이지 않는다. 어렵게 살아 돌아온 주인공은 오히려 갇혀 있었던 수용소를 그리워하기조차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또다시 강제추방을 당한다면. 나는 알아야 했다. 어떤 처음들은 내가 원치 않아도 다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 이어짐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 것은 무엇일까. 왜 나는 밤이면 다시 처참해질 권리를 가지려는 것일까. 왜 나는 자유로워질 수 없을까. 어째서 나는 수용소가 내 것이기를 강요할까. 향수. 마치 그것이 필요하다는 듯. 『본문』 중
최소한의 인간으로만 – 동물에 가까운 – 삶을 떨쳐 버리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전쟁, 전쟁 이후의 삶이 다르지 않다면, 수용소에서의 삶과 현실의 삶 중에 더 나은 삶이 어디일까?
삶의 방향을 ‘정상’이라고 불리는 관습에 맞춰야 한다는 것. 그게 또 하나의 수용소 아닐까? 수용소에서의 “숨그네”와 다시 돌아온 현실에서의 “숨그네”와 비교한다면, 도대체 뭐가 더 감당하기 쉬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