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읽기 쉬운 마음이야

by 전성배

쉬이 빠졌던 사랑. 끓어오르는 주전자에 무심코 손을 댔던 지난 인연이여, 그 사랑의 퇴적물은 내 몸의 밑바닥부터 급격히 쌓여 투박한 모양새로 굳어졌습니다. 단단한 망치로 온 힘을 다해 내려쳐도 무용지물. 이미 끄떡도 없는 옹성이 되어 내 안을 메우고 있습니다. 쉬이 빠진 사랑은 결도 없이 뒤엉켜 굳는다는 것을 미쳐 알지 못한 채로 말이죠. 그런 사랑의 행보는 이기적이고, 괴팍했으며 어리석었습니다. 처음 내려앉았던 첫사랑의 퇴적물은 필히 평평한 판자로 수없이 밀고 정도 했어야만 새로운 사랑을 받아 잘 쌓을 수 있었을 텐데, 내 마음을 무심하게 뒤로 한채 욕심 많은 아이처럼 꾸역 꾸역 담아내기 바빴던 것이죠.


나는 그런 사랑으로 이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수 없는 사랑을 거치고 잠시 혼자가 됐던 날, 묵직한 마음이 답답해 돌아보니 사랑이라 말할 것들은 낙엽을 가볍게 스치는 바람처럼 지나고, 잔여물만 가득 쌓였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동안 마주했던 인연들에서 남은 것을 쉽게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내게 있는 거라곤 어리석음과 이기심 뿐이었습니다. 쉽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일은 아니나, 그만큼 지난 사랑을 갈무리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투박하게 마음을 채울 수밖에 없습니다.


정신체 혹은 영혼이라는 말은 여기서 비롯된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국한된 육체는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이나 지식의 범위, 내가 할 수 있는 이기심과 이타심에도 일정한 크기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평생 자신이 사랑할 수 있고, 배려하고 용서할 수 있는 횟수와 크기가 정해져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무의식중에 벗어나고자 영혼이라는 말로 초월을 꿈꾸는 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 국한된 마음에 섣부르게 사랑을 채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는 마음에 샛바람으로 들이닥친 당신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읽기 쉬운 나의 마음을 훑고 지나간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나의 온도와 전혀 다른 당신의 온도가 급속히 내 안으로 불어 올 때, 결 없이 쌓인 퇴적물의 빈틈을 훑고 지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바람은 퇴적물의 온도를 올려 녹여내더니 빈틈을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쌓이는 것이 아닌, 쌓인 나의 시간을 훑는 것을 택한 것이죠.


부부가 된 인연들은 말합니다. '이 사람 이구나'하는 순간이 있다고. 그 순간이 어쩌면 지난 인연들처럼 쌓이는 것이 아닌 쌓인 서로의 퇴적물을 훑으며 감싸 안고, 이내 빈틈을 메우며 '나'를 완성 시켜주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이 아닐까요. 사실 나는, 설령 이 순간이 그 순간과 비등하다 해도 마음을 다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만한 사랑은 내 평생에 두 번은 오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니 천천히,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오래도록 우리 함께 하기로 해요. 수없이 세어낸 지난밤을 잘 포개고, 앞으로 세어낼 평생의 밤에 갈피를 꽂고 하나하나 곱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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