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의 현에는 연주자의 습성이 밴다.

by 전성배
이거 누가 썼던 거예요? 왜 이렇게 슬퍼?

한 바이올린 연주자의 말이다. 다른 사람이 오랫동안 쓰던 악기를 우연히 사용하게 된 연주자는 바이올린을 켜고 얼마 뒤 이러한 말을 뱉었다. 바이올린의 현에서 알 수 없는 슬픔이 묻어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 봤자 바이올린이 내는 소리일 텐데, 바이올린에 무슨 생명력이라도 담겨있단 말인가?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랜 경력이 빚어낸 자존심이 만든 오만이 아닐까 감히 생각했다. 그런데 바이올린을 만드는 장인들은 그 말에 동감했다. 오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새 악기는 첫 주인의 성향을 따라간다. 그가 경쾌한 음악만을 연주했다면 악기의 소리는 쾌활해지고, 반대로 슬픈 음악만 연주했다면 악기는 슬픔만 배워 구슬픈 울음만 토해낸다.


사는 동안 이러한 말을 참 많이도 들었다.

"자식을 보면 부모를 알 수 있다" "연인은 닮는다"


연인의 관계는 물론이고 천륜조차 결국 독립된 개인 대 개인이다. 사랑이나 혈연 같은 걸로 묶여 있다 하더라도. 자식이 부모를 닮는다는 것에 내외적인 생김새는 인정할 순 있었도 그 성향과 성격까지 닮는다는 것은 믿기 힘들다. 하물며 연인 관계는 설명할 것도 없다. 서로 단절된 세상에서 살다가 만난 둘이 '사랑'이라는 형태도 모를 것으로 묶였다 하여 닮는다고? 인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나의 비뚤어진 시선과 달리 세상은 이를 자연스러운 이치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나는 아버지의 버릇을 닮고 어머니의 걸음걸이를 닮고 연인의 억양을 따라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눈시울을 붉힌 어느 드라마의 장면에서 같은 짠내를 느꼈다. 과거 아버지가 남몰래 노트에 적어 내린 시를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하고는 나의 미려한 감정의 원천을 발견한 것만 같았다. 또 지금의 연인과 사랑을 쌓은 지 3년이 되니 함께 찍은 사진 속 두 사람은 닮아 있었다. 모든 게 신기한 일이다.


나는 한때 이 알 수 없는 현상의 논리를 알고 싶었다. 적어도 아버지를 닮았다는 판결만은 따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논리를 알면 판결에 정식으로 항소하여 태평한 세상의 이치에 오점을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늘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되어 축 저친 어깨로 돌아서야 했다. 때때로 아버지처럼 손해를 보고, 아버지처럼 새어 나오는 감정을 모난 필체로 적어내야만 했다. 이유는 모른 채 궤를 같이하는 나날이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바이올린 연주자의 말을 들었다. 나는 그 순간 아버지와 어머니, 연인을 떠올렸다. 작은 탄식을 뱉었고 "재판 자체가 불가능했었구나"하는 무지함이 얼굴을 달궜다.


나를 처음 연주했던 것이 장인임과 동시에 연주자였던 아버지와 어머니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연주의 습성이 나의 현에 배어들었다. 이제는 어느 누가 와서 연주하더라도 현에 밴 소리만 낼 줄 아는 고악기가 되었다. 연인 또한 마찬가지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관계마다 새로이 떠올라 연주자의 손길에 맞춰 켜지니 내게 그녀가 배일 수밖에. 한 사람의 존재가 악기라면 모두가 납득되는 이야기였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합주에 이타적이고 처연한 음을 내며,

이따금 연인의 독주에 맞춰 찬연한 음을 내는 것으로

구슬픈 내 음을 위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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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과 농산물 사이의 교점을 말하다"

농산물 에세이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전성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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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배 田性培

aq137ok@naver.com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에세이 / 2021 .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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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이면》 : 전자 수필집 / 2020 .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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