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일하게 된 지가 이제는 몇 년째인지 가마득하다. 전통시장에서 직원으로 수년간 일을 하다 그곳을 그만둔 뒤로는 줄곧 이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처음 수개월은 노점 장사를 했고, 그 후에는 인터넷으로 넘어와 과일 중개업을 했다는 건 나의 오랜 독자님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글을 쓰게 된 건 당시에도 치열했던 과일 중개업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책이었다. 과일을 파는 사람은 많아도 글을 쓰며 파는 사람은 드물었으므로. 완벽한 구원책은 아니어도 연명할 수 있는 수단임에는 분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수년을 살았다. 남들 다하는 취업 준비와 거기서 비롯되는 절망과 고독, 허무감은 운이 좋게도 느껴본 적 없다. 그간 금전적으로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글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그것으로도 배를 다 채울 수 없을 땐 내게 일감을 주는 지인과 가족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만난 김서환 농부를 보며 나는 같은 또래임에도 불구하고 어색해 했고 그러면서도 경이로워 했다. 그는 그 감정들을 모두 껶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스스로를 구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그가 아니어도 이 시대의 모든 청년들에게 그 비슷한 어색함과 경이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그러면서도 김서환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을 직접 건축하기에 이르렀으니 나는 여러모로 그가 대단해 보였다.
그는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어떤 농부보다도 어린 사람이다. 그래 봤자 서른하나. 나와는 고작 한 살 차이지만 그렇기에 우리의 대화는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가까웠다. 농업 시장에서 우리 나이는 여전히 어리고 핏기 어린 청춘이다. 그리고 청춘은 다소 어색하고 여전히 배워야 할 게 많지만 그래서 싱그럽고, 두려움도 염치도 없이 희망차다. 우리는 오늘 하릴없이 농업을 사랑하게 된 두 청춘으로서 조금은 아마추어적인 대화를 하려 한다.
추신
또래이다 보니 이번 대화는 사담이 많다. 다만 이 혹한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대화가 사사로우면 또 얼마나 사사로울까 싶다. 모든 게 귀하고 모든 게 가능성으로 향하는 말일 텐데.
전성배 안녕하세요 김서환 농부님. 반갑습니다. 혹 제 목소리가 다소 들떠 있어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좀 설레하고 있습니다.
김서환 안녕하세요. 작가님. 설레시다니! 이제 참외 농사를 알아가는 2년 차 농부라서 저는 저의 말이 얼마나 실속 있을지 걱정인데, 약간 면구스럽습니다.
전성배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령 이 대화에서 농부님의 농경 생활을 모조리 뺀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대화는 충분히 가치가 있을 거예요. ‘가치’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대화를 나누기 전에 제가 잠깐 농부님의 블로그를 둘러봤는데 아주 열심이시던걸요? 또 제가 설레는 진짜 이유는 농부님과 제가 같은 또래라서 그렇습니다. 제가 서른둘이고 농부님은 서른하나라고 하셨죠.
김서환 그렇네요. 또래이기도 하고, 또 그리 말씀하시니 저도 한결 마음이 편해집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전성배 요즘은 농부님과 같은 또래의 청년 농부 수가 제법 많아졌습니다. 빠르면 이십 대 초중반에도 농부가 되는 분들도 있으니, 우리의 나이는 그저 적당한 나이로 보일 정도인데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농부님이 농부가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농부가 되기 적당한 나이라고는 했지만 동시에 농부를 선택하기 쉽지 않은 나이이기도 하니까요. 왜 젊은 나이에 농사를 시작하셨나요? 혹 부모님에게 농장을 물려받으신 건가요?
김서환 현재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짓고 있기는 하지만 승계 농가는 아닙니다. 우선 제가 농부가 된 건 부모님의 귀농이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지난 2019년에 부모님이 귀농을 하신 뒤로 휴일마다 일손을 도와드리려 내려갔었거든요. 그때 농부가 되고자 결심했고, 그로부터 일 년 뒤인 2020년 그러니까 스물아홉 살 겨울에 원래 있었던 경북 구미에서 이곳 성주로 내려왔습니다.
전성배 먼저 귀농을 했던 부모님을 따라 농부가 되셨다니. 그럼 더더욱 궁금해지네요. 보통 승계 농가의 경우에는 부모 세대가 어느 정도 기반을 다져 놓고 물려주는 것이다 보니, 이를 물려받는 자식 세대는 어느 정도의 수익성이나 장래성을 가시적으로 확인하고 시작하게 되잖아요. 반면 귀농인은 모든 걸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니 그런 가시적인 확신은 거의 없죠. 어쩌면 모험을 해야 하는 상태나 다름없는 것인데요. 그런데도 이제 막 귀농을 한 부모님을 따라 농부가 되기로 결심하셨다고 하시니 저로서는 놀랍기만 합니다. 어떤 것이 농부님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 건가요?
김서환 작가님 말씀처럼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수익성을 무시할 수 없죠. 특히나 농부라는 직업은 어떤 직업과 견줘도 지지 않을 만큼 지난한 직업 중 하나이니, 농부가 되는 데에 수익성은 더욱더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당시 조금 무모하게도 수익성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물론 부모님의 참외 농사가 초보치고는 초창기부터 작황이 양호했지만, 평생을 농부로 살겠다는 마음이 설 만큼 충분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농부를 선택한 건 조금 간지러운 말이지만, 농사를 통해 적지 않은 위로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되기 전까지는 취준생이었거든요.
전성배 위로.. 취준생.. 말씀하신 이 두 개의 단어만으로도 농부님의 취준생 시절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쉽지 않으셨겠죠. 농사라는 지난한 노동에서 피로감이 아닌 위로감을 느꼈을 정도로.
김서환 저는 스물아홉까지 취업 준비를 하며 이렇다 할 직장 생활을 한 번 한 적이 없었습니다. 특별한 경험이나 경력 없이 이십 대를 오롯이 취업 준비에만 쏟아부은 것인데요. 작가님은 상상이 되시나요? 그 불확실한 나날의 연속을. 그 시간들은 더없이 외향적이고 긍정적이었던 저를 끝없는 우울과 어둠을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고독한 도서실과 방을 전전하다 이따금 소음에 대한 갈증으로 카페를 찾아 공부를 하던 나날들. 그 조밀한 삶에 취직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과 그렇게 나이만 먹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억지로 틈을 벌려 자리했습니다.
전성배 그런 농부님을 순수한 노동이 구원해 준 거군요.
김서환 네. 여느 때처럼 어머니의 부탁으로 일손을 도와드리기 위해 농장을 찾았던 어느 날, 아주 잠깐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리를 비웠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불현듯 저는 그 하우스 안에서 왕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절대 권력을 가진 주인.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요.
전성배 왕. 주인. 통제. 조금 더 자세히 들려주세요.
김서환 남들과 마찬가지로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회사가 원하는 요건에 맞추고자 저를 재단하던 날들은 마치 회사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회사에 철저히 통제를 받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회사의 소속이 되면 통제는 끝나는 게 아니라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걸 직감했죠. 그런 현재의 삶과 예정된 미래가 저의 우울의 많은 지분을 차지했습니다. "피동적인 삶을 살기 위해 나는 지금 이토록 불안해하고 고독해야 하는 걸까"라는 물음은 계속해서 반복되었고요.
그리고 그런 중에 하우스 안에서 불현듯 군주로서의 어떤 순수한 책임감 같은 걸 느낀 것입니다. 오직 나의 손길만을 기다리는, 내가 돌보지 않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죽어 버릴 수 있는 가냘픈 작은 것들을 보면서. 저의 손길에 좌우되는 생명들을 보노라니 이들을 지키고 싶다고 잘 길러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에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설령 취업을 하더라도 느껴보지 못할 감각을 그날 느낀 거죠.
전성배 그렇죠. 농부가 아니라면 결코 느끼지 못할 생을 책임지는 감각. 그 어떤 직업과 견줘도 고되기 이를 데 없는 농부를 기꺼이 선택하게 할 만큼 매혹적인 감각일 거라 예상해 봅니다. 참 부럽습니다. 여건상 농부가 될 수 없어 한발 물러서서 이야기를 듣는 게 전부인 저로서는 그저.
그럼 지금의 농장은 가족들이 함께 꾸려가는 농장이겠군요.
김서환 현재는 그렇지만, 당장 내년부터 저는 독립할 예정입니다. 청년농 지원 사업에 합격하게 되어 제 농장에서 제가 모든 걸 주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거든요. 어떻게 보면 지금은 훗날 저의 농장에서 참외 농사를 잘 짓기 위한 연습 과정이라 생각하며, 아버지의 농일을 도와드리고 있는 거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전성배 지금처럼 가족농의 형태로 농지를 확대해 나가셔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독립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김서환 아실지 모르겠지만 가족과 함께 일하면 많이 부딪칠 수밖에 없는데요. 좋은 농작물을 기르기 위한 충돌은 기꺼이 참아낼 수 있지만, 보다 다양한 농법과 시도를 원하는 저와 달리 아버지는 그렇지 않으시답니다. 아버지는 규격화된 농법으로 최대한 안전하게 양질의 참외를 생산하길 원하시기 때문인데요. 이런 부분에서 자주 의견이 갈리다 보니 저는 저만의 농장에서 다양한 그림을 그리며 농사를 짓고자 독립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전성배 공감해요. 저도 아버지가 인테리어업을 작게 하고 계셔서 종종 일손을 도와드리는데요. 같이 작업을 하다 보면 꼭 의견 충돌이 생기더라고요. 당연히 더 많이 경험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게 맞지만 저도 점차 눈이 트이면서 보이는 게 많아지니.. 속편히 아버지의 의견을 따르고 싶다가도, 한편으론 보다 다양한 시도를 하고 싶은 마음에 답답해지는 것 같습니다. 다만 김서환 농부님과 아버님도 어쨌든 더 좋은 결과물을 위해 부딪치는 거잖아요. 마치 건강한 라이벌 관계 같아 보기 좋습니다.
김서환 라이벌이라.. 정말 그렇네요. 제 농장에서 아버지보다 더 맛 좋은 참외를 길러내는 것으로 저의 방식도 또 하나의 답임을 증명하는 게 목표이니.
전성배 하루빨리 농부님의 농장에서 오직 농부님의 손길만으로 길러진 참외를 맛보고 싶네요. 분명 첫 참외부터 아주 맛이 좋을 테죠. 아버지의 농장에서 이렇게나 열심히 하고 계시니까요. 마치 수련을 하듯이.
농부님께서는 지금도 블로그에 자신의 농경 생활을 꾸준히 연재하고 계시죠. 앞으로도 꾸준히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청년농에 선정되어 농지를 구하고 농사를 시작하는 첫걸음부터 그 앞으로의 걸음까지. 농부님과 같은 삶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김서환 구세대에서 신세대로 넘어가는 지금. 그 걸음 중에 생길 혼란을 잠재우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요.
전성배 감사합니다. 그럼 마지막 질문을 드리는 것으로 대화를 끝내고자 합니다. 질문은 하나지만 대답은 두 개인 질문인데요. 농부로서의 꿈과 김서환으로서의 꿈은 무엇인가요?
김서환 농부로서는 앞으로 꾸릴 저의 농장을 발판 삼아 참외 농부로서 대성하고 싶습니다. 맛있는 참외를 기르는 농부로 이름을 알리고, 그러면서도 꾸준히 참외 개발에 힘쓰면서 열심히 살고 싶고 그만큼 돈도 많이 벌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년에 김서환으로서 이 시간들을 반추했을 때 스스로 열심히 살았다고 인정하는. 후회 없는 삶이길 꿈꿉니다.
전성배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가혹하게 들리기도 하네요.
김서환 모르죠. 이렇게 말해 놓고 실제로는 대충 살지도. 어쨌든 인생의 말미에는 이 정도면 열심히 살았다고 제 스스로 타협하지 않을까요?
전성배 과연 어떨까요? 밤 아홉 시에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어느덧 밤 열 시가 넘도록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대화를 하기까지 약 열흘이란 시간을 기다려야 했고요. 그만큼 바쁘셨고, 빠듯하셨던 김서환 농부님이셨습니다. 부디 말씀처럼 조금은 설렁설렁 살아 주시기 바랍니다. 건강하게 원하는 바를 이루고 오래도록 행복할 수 있도록.
존재했고 존재하고 존재할 위대한 이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업적과 권력, 재력, 영향력 등을 가지지 않았다. 그중에는 기실 그 모든 걸 갖춘 채 범접할 수 없는 위인의 면모까지 드러내는 이들도 있지만, 나의 이웃집 박 씨 아저씨와 이 씨 아주머니, 나와 누나를 길러낸 아버지와 어머니와 같은 범인들도 다수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이들 모두를 조금의 차이도 없이 '위대한 이'라 통칭한다. 이 삶을 성실히 이어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므로. 따라서 고독과 우울 끝에 농부가 되어 미래를 그리는 김서환 그 또한 위대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오늘 또 한 명의 위대한 이와 대화를 나눴다. 정확히 말해 아직은 위대하다고 말할 수 없는 불완전한 청춘이지만, 그는 분명 훗날 ‘존재할’ 위대한 이다. 모든 위대한 이들의 걸음이 김서환 농부의 걸음과 비슷하게 시작되었으니까.
2022. 4. 24
전성배田性培 : 1991년에 태어났다. [격간隔刊 전성배 산문]의 발행인이며, 농산물을 이야기하고 농부를 인터뷰한다. 농업계 이슈에 관심이 많고, 여러 주제로 글을 쓰지만 대부분 삶의 테두리 안에 머문다. 지은 책으로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가 있다. 계속해서 우리나라 농부에게 도움이 될 글을 쓰는 것과 더불어 문학적으로 완성도 있는 글을 쓰는 것이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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