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 가게에서 일하던 시절의 여름. 뜨거운 계절에 데워진 생은 격동하고, 여기서 태어난 과일들은 통제 없이 그저 쏟아져 나올 줄만 알던 때, 수박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과일이라 해야 할지 채소라 해야 할지, 말이 많다가 이내 ‘과채류’로 분류가 되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여름이면 가장 사랑받는 과일 중 하나라고 불리는 수박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 들려 드릴게요.
여름처럼 뜨겁게 젊었던 시절, 제가 일하던 가게는 수박을 판매할 때 한 통도 배달을 했습니다. 요즘은 그게 과일 가게의 기본값이 된 듯한데요. 당시만 해도 그런 가게들이 흔치 않았습니다.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장 근처 경쟁 가게들만 봐도 얼마 이상 혹은 다른 과일과 함께 사야만 수박을 배달해 주었죠. 그래야 손해를 보지 않으니까. 수박 한 통 배달은 그렇기에 나름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5킬로, 7킬로, 9킬로 이상의 수박들을 골고루 판매했지만 예외는 없었습니다. 5킬로 한 통을 사도 수 시간 내로 고객의 집으로 배달을 했습니다. 고객들의 반응은 역시나 좋았어요. 이유는 이랬습니다.
저희 가게가 있던 전통 시장은 공영 주차장 많이 협소해서 그런지 몰라도 고객들 대부분이 도보로 장을 보러 왔습니다. 혹은 시장에 장을 보러 가는데 굳이 차까지 끌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동네 상권이었으니까요. 이유야 어떻든 많은 분들이 도보로 오다 보니 그들의 손에는 장바구니가 필수다시피 들려 있었습니다. 쇼핑백 형태 아니면 캐리어 형태. 그리고 장바구니를 챙겨서 장을 보러 올 정도의 사람들은 과일만 사지 않았습니다. 고기, 생선, 야채, 찬거리, 간식거리 등등 웬만하면 한번에 사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수박 구매만큼은 쉽지 않았어요. 애플 수박이 아니고서야 아무리 작은 수박이라 해도 크고 무거우니, 다른 물건들과 한 바구니에 같이 둘 수가 없는 겁니다. 다른 물건이 망가지거나 수박 때문에 사야 하는 걸 못 사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에. 때마침 다른 과일도 떨어져 한번에 다 같이 구매해 배달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결국 수박 하나를 위해 불필요한 소비를 해야 하거나 다른 가족, 친구, 지인의 힘을 빌려야 했어요.
저희 가게는 그 부분을 공략하기로 했습니다. 배달할 사람을 따로 두면서까지 수박 한 통도 배달했고,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저희 가게에서 수박을 한 번이라도 구매했던 사람 중에는 그다음부턴 얼마짜리 수박을 어디로 가져다 달라고만 말하곤 휙 가버리는 수준까지 갔어요. 평일에도 수십 통의 수박을 배달해야 할 정도로 바빴지만, 결론적으론 매출은 물론이고 이미지까지 챙길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앞에선 수박 한 통 배달이 요즘은 기본값이 되었다고 했는데 사실 그렇지 않은 곳이 여전히 있어요. 아예 배달을 안 하는 곳도 있고요. 가령 저의 여자 친구와 그의 가족들이 모두 좋아하는 한 과일 가게가 그렇습니다. 배달 서비스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그 과일 가게의 과일을 거의 맹신하는 여자 친구 입장에서는 여름이면 특히 아쉬운 부분입니다. 여름이면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수박을 살 정도로 수박을 좋아하거든요.
다른 과일 가게와 인터넷 등에서 몇 번 구매해서 먹어 봤지만 그 과일 가게만큼은 아니란 걸 알고는, 수박도 그 가게에서만 사 먹습니다. 도보로 집에서 20분 정도의 거리라서 차를 끌기에는 아까운 지 캐리어식의 장바구니를 가져가서 힘겹게 들고 와요. 그런 여자 친구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직접 사다 주는 것. 이제 곧 사귄 지 6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중 족히 4년은 제가 직접 수박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여자 친구의 집에 수박이 떨어질 때쯤 산책하는 길에 맞춰 수박을 사서, 여자 친구네 집으로 가져가는 일을 매년 여름마다 한 달에 두어 번을 해요. 그럼 여자 친구는 매번 수박을 받을 때마다 눈빛과 말로 사랑한다 해 주는데, 그걸 보는 게 좋아서 계속하는 중입니다.
한 번은 여자친구가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내 입에서 사랑해라는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그래서 자주 서운한데, 한편으론 괜찮기도 하다고. 제 행동에서 그것이 들리기 때문이란 게 이유였습니다. 그녀의 고생을 대신하여 그녀가 좋아하는 수박을 사다 주는 행동 같은 것들이 그렇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느덧 우리에게 수박은 사랑으로 발음되고 있었던 겁니다. 이 이야기는 아래의 링크에서 조금 더 아름다운 문장으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미 이 글에서 모든 내용을 알 수 있지만, 그럼에도 더 많은 문장을, 더 아름답게 발음 될 문장으로 다시 읽고 싶으신 분은 꼭 밑에 링크를 찾아 주시기 바랍니다.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여자 친구의 퇴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녀를 대신해 우산을 들려고 합니다. 오른손에 우산 손잡이를 쥐고 여자친구를 오른편에 바짝 붙여 두고, 왼쪽 어깨는 가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아마 오늘은 그게 사랑으로 읽히겠지요.
<사랑을 말하는 수박>
"그때부터였다. 수박이 먹고 싶은 사람에게 수박을 가져다주는 일은, 당신을 대단히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표현 중 하나라고. (...) 내게는 사랑이 그렇다. 고생을 대신하길 주저하지 않는 마음. 상대가 좋아하는 걸 건네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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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배田性培 : 1991년 여름에 태어났다.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야자 시간』 이 있다. 생生이 격동하는 시기에 태어나 그런지 땅과 붙어사는 농부와 농산물에 지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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