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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성배 Jul 20. 2024

내가 팔았던 계절

한때 몸담갔던 일을 부정당했다. 하루 열세 시간 이상 꼬박 그 시절을 쌓는 일에 썼는데. 그 시간이 고되고 막막해서 다른 일은 꿈도 못 꿀 정도였는데. 그렇기에 그 시절은 반드시 지금에 이르러 나를 아주 잘 살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부정당하고 말았다. 실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던 일임을 깨달았다. 설령 그렇게 일해야 한다 해도 충분히 다른 생각도 하며 더 나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 정도로 과일 파는 일은 단순하고 명료했기에. 도매시장이나 농부를 찾아가 과일을 떼와서 얼마의 마진을 붙여 파는 게 전부다. 가공하지 않은 농산물은 면세 상품으로 구분되어 세금 계산도 단순하다. 재고 관리 같은 비교적 경험에 의거한 계산법이 어렵다면, 우선 그날 팔고자 하는 물건을 소극적으로 떼와서 팔면 된다. 그 시간도 조금만 쌓이면 금세 자기만의 기준이 잡힌다. “이 정도면 오늘 다 팔 수 있다.”


밑천도 많이 필요하지 않다. 장소를 구하고, 재고를 확보하는 데 필요한 자금조차 없다면 애당초 둘 다 없이 시작할 수도 있다. 먼저 도매시장이나 산지에 있는 유통업자와 생산자를 찾아가 상품을 소싱한다. 당신의 과일을 팔고 싶다고. 주기적으로 주문자 정보 등을 취합해 발주를 할 테니 잘 포장해 배송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성사가 되면 계약한 공급가에 내 마진을 붙여 팔면 된다. 이렇게 일을 시작하는 데에 드는 비용은 나의 경우엔 출장비와 초반에 선지급했던 결제 대금까지 다해서 수십 만 원에 불과했다. 이 외 마케팅과 디자인에 대한 것도 비용이라면 비용이지만, 나는 자급자족했다. 관련 정보는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일에 대해 몰라도 된다. 제철 과일 정보도 인터넷에 널려 있으니 시기적으로 곧 철이 될 과일을 찾아 그것부터 소싱하면 되고, 고객을 상대하며 알아야 할 정보는 생산자에게 물어보면 된다. 자신의 과일을 판다는 거래처이니, 농부님들은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적극적으로 말을 건다. 그 과일에 대해서라면 농부만큼 아는 사람은 없다.


말을 길게 했지만 결론은 이미 나왔다. 현장에서 몇 년씩 시간을 보내며 노동하지 않아도 과일 장사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기에 누구나 쉽게 실패하기도 한다. 정도를 넘어서는 고객을 만나거나 하루아침에 공급처를 잃어버리는 등 사람에 의해서 또는 생각만큼 벌리지 않는 시장 상황에 의해서.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과일 장사는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 앞에 쉽게 무너지고 만다.


누군가의 재능을 사고팔 수 있는 플랫폼에는 지금도 인터넷 과일 장사 노하우를 담은 전자책들이 절찬리에 판매 중이다. 적게는 몇 만 원에서 많게는 십수 만 원에 이르기까지, 금액은 다양해도 노하우는 비슷하다. 실제로 사서 읽어 보면 거짓 하나 없다. 정말로 과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도 그 책들이 알려 주는 길을 따라가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 면에서 그들이 책정한 가격은 얼마든 간에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내가 몇 년씩이나 쏟아부었던 시간은 기어이 허송세월이 되고 만다. 하지만 시작한 다음이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발걸음은 내딛게 하는데 그 이후가 없다. 티브이 화면 속 주인공이 호기롭게 프레임 밖으로 발을 내디뎠지만, 그다음 시퀀스가 등장하지 않는 느낌. 무한히 그저 기다리게 되는 느낌. 그래서 이 책을 쓰기로 한 것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함과 동시에 이 글을 떠올렸지만, 완성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적응과 바쁨을 핑계로 게으름을 숨겨 본다.


이 책은 최악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쓰였다. 과일 장사꾼으로 한 시절을 살았던 나의 더 젊었던 날을 한 자 한 자 써내어 반드시 찾아올 위기를 귀띔하고, 가능한 한 극복할 힌트도 주고 싶었다. 또 다른 한 편으론 각박한 과일 장사꾼의 삶을 동정하고 싶기도 했다. 당신보다 더 혹은 당신만큼 어려웠던 나의 삶을 말하는 것으로. 나만큼 이 일을 비극적으로 한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독자는 두 명이다. 나처럼 계절을 팔았거나 이제 팔려고 하는 사람. 그 둘에게 이 책의 모든 장을 받친다.


아주 오랫동안 나를 먹여 살리던 일 뒤로하니,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그 일이 다져준 길을 너무 오랫동안 걸었다. 눈과 몸에 많이도 익어서 아예 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다른 길을 걸을지언정 그 길을 잊지 않기로 한다. 다른 길을 가더라도 그 길이 눈에 아른 거리는 길이길 바라본다. 아니 바라지 않고 그러기로 다짐해 본다.



과일 장사꾼을 위한 이야기� <내가 팔았던 계절>

https://litt.ly/aq137ok/sale/Zm0Fk1U


전성배田性培 : 1991년 여름에 태어났다.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야자 시간』 이  있다. 생生이 격동하는 시기에 태어나 그런지 몰라도 땅에 붙어사는 농부와 농산물에 지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


aq137ok@naver.com

https://litt.ly/aq137ok :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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