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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talie Oct 05. 2024

|안개꽃 뽀글 파마머리 울 엄마|

   "엄마 미안해 너무 늦게 와서 그때"


자그마한 체구와 아담한 키, 아름답게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와 크고 맑은 눈, 새하얗고 고운 피부, 아기자기하고 귀여우신 코와 입, 늘 오래간다며 잘 나왔다 좋아하셨던 뽀글거리는 안개꽃다발 같은 파마머리, 계란형 얼굴, 예쁘고 자그마한 손과 발, 늘 활기가 넘치시며 누구에게나 너무 친절하시고 인정 많기로는 또 온 동네 소문이 자자하셨던, 연세 들어가시는 동안도 여전히 밝은 미소와 활기를 잃지 않으셨던 정말 고우셨던 분......


 바로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 누구보다 가장 사랑하는 분, 나의 엄마이시다.



그 고운 손은 우리 넷을 키우시느라 거칠어지셨고, 그 반짝이던 예쁜 눈은 빛을 잃어가셨고, 그렇게 활기 많으셨던 에너지는 쇠퇴해져 가셨으며, 그 많은 친한 지인들도 자주 못 보시게 되신 분은, 아직도 고우셨지만 몸과 마음이 많이 연약해지셨던, 암에 걸리신 후의 우리 엄마이셨다.




우리 엄마는 60대 초반밖에 안 되셨던, 지금으로 치면 정말 젊으셨었던 시기에 임파선 암 판정을 받으시게 되셨다.


당시에 나는 오클랜드 시내에 위치한 면세점에서 랑콤의 카운터 매니저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엄마가 암이라며 울고 있는 우리 언니의 전화를 받고는, 손님들도 많았던, 면세점에서 전화기를 떨리는 두 손으로 붙들고는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 후 오랫동안 암투병을 하시는 동안도 늘 밝고 희망적이고 유쾌함을 잃지 않으시려고 최선을 다하셨던 우리 엄마는, 항상 복이 너무 많아서,  그렇게나 착한 울 오빠와 새언니가 지극정성으로 엄마를 돌보아 주었다고 말씀하시며 면목이 너무 없도록 고맙고 또 한없이 미안하다고 늘 말씀을 하셨었다.




 나에게 있어서 오빠와 새언니는 이제 천국에 계신 엄마를 대신한 늘 그립고 진심으로 고마운 고향이다.  달랑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 몇 마디로는 절대적으로 턱없이 부족하여, 감사와 죄송한 마음을 평생 안고 살아가고 있다.


멀리 있어서 편찮으신 엄마 그리고 아버지께 아무것도 못 해 드리고, 또 늦은 나이에 공부를 다시 한다는 핑계아래 걱정만 끼쳐드렸으며, 심지어 엄마 아버지 임종도 못 지켜드렸던, 그렇게나 예뻐하셨었던 응석받이 막내딸이 불효녀가 돼버린 이, 그게 바로 나란 몹쓸 사람이다.


오빠와 언니의 희생적인 그리고 진정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지극정성을 다한 돌봄 덕분에, 엄마는 암이 걸리신 후에도 건강관리를 나름 잘하시고 계셨기에, 내가 웰링톤에 있는 메씨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할 당시,  60대 중반정도의 엄마께서  뉴질랜드에 나와 언니 그리고 조카들을 보시러 오실 수 있으셨다.




언니네 가족들이 살고 있었던 집은 오클랜드의 노스쇼어에 위치해 있었다. 차량통행이 아주 많은  큰 길가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 곳에 위치해 있었고, 경사진 길을 통해서 올라오다 보면, 밑에서 위쪽에 있는 집이 보이는 구조였었다.


그 당시 나는 웰링톤에 있었던  대학교 기숙사에 살고 있었기에, 엄마께서 오시기로 하여서, 나도 오클랜드에서 방학 동안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하였다.



오클랜드 시내의 친구 아파트는 방학 동안은 대부분 비어있었기에, 나는 방학 동안 그곳에서 전기세 물세만을 내면서 지내기로 하였다. 엄마는 언니의 집에서 머무시다가 자주 나와 함께 친구의 아파트에도 오시며,  같이 이곳저곳 여행도 다니고, 가족들과 맛있는 외식도  했었던, 정말 귀하고 행복했었던 기억들을 더듬어 본다.





그해 여름방학 (여기에서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여름이다)의 어느 날, 곧 다시 새 학기가 시작되어 웰링톤으로 내려가야 했었기에, 그다음 날은 엄마와 함께 둘만의 시간을 가지기로 하고, 아침에 되도록이면 일찍 엄마를 모시러 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전날밤 갑자기 당시 힘든 일을 겪고 있던 친구의 전화로 늦게까지 위로와 수다를 떨다가 너무 늦게 자버린 바람에, 아침에 10시도 넘어서 깨어버렸다.  


언니는 주중에 일을 하러 갔었기에, 잠시 다니러 오셔서 핸드폰이 없으셨던 엄마와는 연락이 안 되었다.


최대한 빨리 준비를 한다고는 했지만, 지금보다는 준비가 한창 걸리는 젊은 시절이었기에,  화장, 머리손질, 옷단장까지 나름 빨리 하고는, 또 주차장이 없는 아파트라서, 차를 주차해 놓은 곳까지 또 20여분을 걸어서 간 후, 다시 시내부터 노스쇼어까지 25분가량을 운전하여 오다 보니, 이미 시간은 12시가 막 넘어가고 있었다.




차를 큰 길가에서 언니네 집이 있는 쪽 가파른 길로 우회전해서 걱정스러운 마음에 언니네 집을 올려다보았다.


언니네 집은 밑에서 보면 주방과, 그리고 주방을 따라 방으로 가는 복도 그리고 방의 창문이 길 쪽을 향하고 있어서, 보통 내가 언니집에 놀러 올 때에는 부엌에서 음식준비를 하고 있는 언니가 보이는 구조이다.


언니의 부엌 창문 아래쪽 창틀에 자그마하셨던 엄마의 안개꽃 뽀글 파마머리의 정수리 끝이 보이더니,  엄마의 뽀글 머리가 복도로 움직이며 방 쪽으로 사라지는 게 다 보였다.


 그때까지도 내가 언제나 오려나 부엌 창문으로 차가 들어오는 길을 보고 계셨던 엄마가 아주 단단히 화가 나셨던 모양이셨다.



나는 재빨리 차를 주차하고 바로 집으로 뛰어들어갔는데, 엄마는 방안에 들어가셔서는 문을 닫고 계셨다.


"엄마 엄마 ~미안해. 어제 친구가  고민이 있다 해서 이야기하다가 새벽에나 잤어. 미안해~~ 배고프시지 빨리 나랑 좋은데 놀러 가자! 응?"


"난 안가. 집에 있을 테니, 너 혼자가. 대체 시간이 몇 시야 아침에 온다 해놓고는.... 난 안 갈 테야.."


"엄마~~~ 엄마~~~ 가자~~ 나랑 가자~~. 미안해 화 푸셩, 나랑 가용. 응?"


나는 엄마의 자그마한 어깨를 감싸고 안아드리며, 어릴 때 외엔 피어 본 적 없는 온갖 애교짓과 요사스러운 까불이 춤까지 추며 엄마를 결국 웃으시게 하는데 성공했다.


알고 보니 엄마는 7시부터 일어나셔서 샤워하시고, 예쁜 뽀글 머리도 감으신 후 풍성히 더욱 뽀글거리게 단장하시는 외출 준비를 다 하시고, 집도 다 정리도 하신 후, 성경도 보시다가, 그런데도 내가 하도 안 와서 부엌 창밖만 수십 번을 몇 시간째 보고 계셨던 것이었다.  




왜 그렇게나 철딱서니 없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나의 1호 팬이시며, 내가 가장 아끼고, 또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분과의 약속을 해놓고는,  그렇게나 기다리시게 하고, 당시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하고는 이미 연락도 끊긴 지 오래인 무의미한 관계인 것을….. 진정으로 바보 얼간이였던 그때의 내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고 밉고 싫다....


정말 30살이 넘고도 그토록 철딱서니 없고, 못된 딸이 다 있었네..... 그게 나였네….


지금은 언니가 살고 있지 않는, 그 집 앞 큰길을 지날 때마다, 엄마의 화난 뽀글 머리가 부엌에서부터 복도 그리고 방으로 움직이는 생각이 끊이지를 않고, 그럴 때마다 너무 귀여우셨던 엄마를 그리면서도 또 동시에, 왜 내가 그토록 14년째 내내 보고 싶어 하고, 사랑하며, 그리워하는 내 엄마를 그렇게나 오래도록, 기다리시게 그리고 속상하시게 했었던 건지…. 나 자신을 원망하게 된다. 후회하게 된다.




 


그날 엄마를 모시고 노스쇼어의 아름답고 매력적인 항구도시인, Devonport (데본포트)라는  곳에 가서 차를 세우고, 당시에는 있었던 명동 칼국수에서 점심을 사드리고, 옆의 카페에서 커피와 머핀을 테이크아웃해서, 페리를 타고 오클랜드 시내까지 크루즈 여행하듯이 엄마와 갔었는데,  그날은 다행히 날씨가 너무 쾌청하였고, 새파란 하늘과 코발트빛 바다가 실제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어우러지고, 예쁘고 실로 아름다왔었다.


원래 평소에도 바다를 무척 좋아하셨던 우리 엄마께서는 아침 토라짐의 여운마저도 싹 가시도록

 "바다가 정말 너무나 새파랗고 곱고 예쁘네"를 연발하셔서 나도 마음의 죄송함이 조금은 덜하게 되었었다.


귀여운 소녀처럼 환하게 웃고 계신 우리 엄마는 그때 정말 혼자 보기에 아까울 만큼, 너무도 곱고 마냥 행복해 보이셨다



40대 중반경의 우리 엄마와 아버지


우리 엄마는 내가 아는 분들 중에 가장 사랑스러우시고, 착하시고, 자신보다는 늘 자식들과 이웃들을 먼저 챙기시고, 그 누구보다도 부지런하시고 알뜰하셔서, 거의 평생 일을 하시며 우리 4남매를 뒷바라지해 주셨었다.


마음은 또 너무 여리셔서, 남한테 조금도 싫은 소리를 못하시며, 차라리 우리가 조금 손해 보는 게 낫다 가르쳐주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엄마가 돌아가신 지난 14년 동안 매일 한 번도 엄마 생각을 안 해본 적이 없는 철없었던 막내딸도 이제는 중년이 되어버렸다.


그런 엄마를 그렇게나 기다리게 하고 속상하게 하고, 인생의 센 파도를 다 맞는 엄마의 최애 막내딸 때문에 마음고생만 하신 엄마!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그때는 말 못 했어요. 정말 많이 많이 사랑해요


**이미지: pexel, pixa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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