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과 사랑으로 배우는 세상물정
나중에야 안 사실이었지만, 나는 유학 초반에 참 부유(?)했더랬다. 누군가는 중국의 공항에서 캐리어와 함께 열두 시간 밤을 지새울 때, 나는 직항비행기를 타고 독일로 날아왔고, 내가 갈 도시까지 ICE(Intercity Express : 국제 장거리 열차)를 타고 예약한 좌석에 앉아서 갈 때, 누군가는 텁텁하고 불쾌한 공기 속에서 새벽 FLIX 버스를 타고 도시를 이동했고, 누군가는 이상하고 기묘한 독일의 여러 WG(공동주거형태의 집)를 전전하는 동안 나는 묵을 방을 구할 때까지 호텔에 묵었다. 유학을 시작하는 마음가짐이 처음부터 조금 느슨했던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후 얘기할 예정된 실패에 관한 것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다.
음식 - 별로 따뜻해지지 않는 방 안의 라디에이터 하나에 찰싹 달라붙어 방을 찾는 것과 시차적응을 핑계로(사실 한국에서 뒤집어져 있었던 생체리듬 덕분(?)인지 시차적응이랄 것도 없었다.) 일주일을 호텔에서 지냈다. 숙소는 조리 시설도 하나 없는 곳이었어서, 장시간의 이동 후 차갑고 메마른 내 몸과 목을 데울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독일의 겨울밤은 한국보다 훨씬 빠르고 무겁게 찾아오는 느낌이다. 결국 다음날부터 호텔에서 나갈 때까지 나는 감기를 앓았다.
한국에서 공부해 온 독일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손짓발짓으로 겨우겨우 사 와서 먹은 첫 되너(Döner)는 짜고 기름졌지만, 야채든 고기든 소스든 큰 빵 안에 듬뿍 들어있는 데다 가격이 저렴해 헛헛한 몸과 마음을 나름 채워주었다. 며칠을 마트에서 골라 집은 치즈나 햄, 빵 같은 것들과 되너로 끼니를 때우다 보니 따뜻한 것이 너무나 먹고 싶었다. 식당을 가서 수프라도 사 먹으면 됐을 것을, 나는 소심한 성격에 부족한 독일어까지 발목을 붙잡는 것을 뿌리치지 못했다. 결국 어느 날 나는 핸드폰에 준비한 독일어를 켜둔 채 리셉션을 찾아갔다. 뭔가 끓인 물이나 전자레인지를 이용할 곳이 없냐고 물었더니, 호텔에 작게 딸린 바에서 커피포트를 빌릴 수 있었다. 진작 그러지 않았던 나의 미련함을 늘 책망하지만 늘 이런 식이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으로 나는 곧장 동네에 있는 한인마트로 달려가 컵라면과 보리차, 김치 같은 것을 잔뜩 사와 배가 터지게 먹었다.
한국을 벗어나 며칠만 지내보니 뼈저리게 느꼈다. 한국인은 뜨겁고 빨간 것이 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사람 - 호텔은 너무 비싸다고 뒤늦게 생각한 나는, 잠시 쯔비쉔(Zwischen : 일정 기간 집주인의 방 하나를 빌려 지내는 형식)으로 숙소를 옮겼다. 쯔비쉔의 집주인이었던 한국인 부부는 내게 독일에 관련한 여러 팁들을 알려주고, 그들이 다니는 바로 근처의 대학교와 멘자(Mensa : 대학교에 딸린 교내식당.), 주말에 열리는 벼룩시장, 마을의 미술관 등을 소개해주며 나를 많이 챙겨주었다. 독일 뉴비를 만나 신난 고인물의 즐거움 같았던 걸까. 그런 그들의 노력이 무색하게, 그곳에선 또 위장염에 걸려 며칠을 골골대며 누워만 있었다. 흔히 말하는 물갈이를 제대로 했나 보다.
쯔비쉔에서 나오는 날, 건물 앞까지 배웅해 주겠다는 집주인이 키를 안 챙긴 것을 몰랐던 나는 나오면서 문을 굳세게 닫아버렸고, 그대로 집주인을 밖에 가둬버렸더랬다.(독일은 대부분의 집들이 열쇠를 사용해 문을 잠그고, 키 없이 문을 잠궜다가 열쇠공에게 큰 돈을 날리는 썰은 정말 많았다. 그런데도..) 그는 근처에 동거인이 있어 금방 올 수 있다며, 새 집에 들어가기 위한 인터뷰에 늦지 말라며 나를 보냈주었다. 그냥, 근처에 오면 언제든 차 한잔 마시러 오라며 서툰 내게 늘 다정하고 밝은 미소만 보여주었다.
이후로도 많은 음식과 사람들을 만났다. 각자의 따뜻함과 차가움은 타지에서 홀로 생활하는 내게 색다른 맛으로, 새로운 관점으로 기억에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