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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우선순위

by 글마중 김범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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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이 촬영한 사진



예술복지재단에서는 일 년에 한 번 출판지원 신청을 받는다. 2023년 접수 기간은 2022년 12월 28일부터 16일간이고 미발표 작품 제출이 필수였다. 지원율이 낮을 것 같아 8년 전에 써놓았던 중편 소설을 퇴고하기로 했다. 16일! 부족한 기간은 아니었으나 1월 8일부터 11일까지 미용장 대전지회 제주 워크숍도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주도 출발 전에 접수해야 했다. 열흘 동안 짐승처럼 씻지도 않고 현시점으로 완성한 소설을 인쇄했다. A4 용지 45장은 읽는 시간도 오래 걸렸고 어색한 문장도 많았으며 8년이라는 시대적 차이가 심각해 앞이 캄캄했다. 단편 2편을 선택할걸.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심혈을 기울여 퇴고한 다음 인쇄해서 읽어보고 고치고 또 인쇄해서······. 개미 쳇바퀴 도는 소설 고치기는 말 그대로 퇴고 지옥이었다.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1월 8일을 맞았다. 안 가면 되잖아! 남편은 쉽게 말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미용장 워크숍은 지난해 10월 월례회에서 결정한 사안이었고 하루는 제주 골프일정까지 잡혀있다. 어디 그뿐인가? 회원들은 지난 11월부터 12월 초까지 신춘문예에 도전한다고 모든 일정에 참석하지 못하는 나를 진심으로 응원하며 기다려주기까지 했다. 절대 티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무거운 마음으로 집을 나서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머릿속에는 문장들이 뭉게구름처럼 둥실둥실 떠다녔다. 일출 사진과 새빨간 먼나무 열매와 동백꽃이 흐드러진 제주 풍경은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문장들을 반 넘게 지웠다. 그런 데도 내 사고 체계는 틈만 나면 노련한 의사처럼 핀셋과 칼을 들고 잘못된 소설 부분을 집도하고 있었다.


회원 중 A는 왠지 거리감이 있었다. 한참 후배라 친해질 계기가 없었을뿐더러 갑부라는 선입견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런 A가 도도한 이미지와 달리 운영진의 마음으로 회원들을 챙겨 많이 놀랐다. 직함이 높거나 성공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반드시 있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 비행기 트랩까지 가는 초만원 버스에 오르자 먼저 타고 있던 B가 서둘러 짐을 받으며 자리를 양보했다. 괜찮다고 사양하다 깜짝 놀라 잠깐! 하고 소리쳤다.

“언제 다쳤어?”

“선배님 쉿!”

B는 엄지손가락과 손톱을 짓찧어 검붉게 피멍이 들고 퉁퉁 부어 있었다. 다친 지 이틀은 된 것 같았다. B는 그 손으로 행사 끝날 때마다 사진 찍고 탁자를 정돈했던 것이었다.


단체 게임을 통쾌하게 진행하던 C를 비롯하여 스물여섯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귀하디 귀한 3박 4일이었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느라 쪽잠을 자며 준비했던 미용장 시험에 대한 공감과 그로 인한 끈끈한 친밀감과 유대감, 깊은 배려, 기분 좋은 양보, 끊임없는 장난, 선을 넘지 않는 디스로 인한 유쾌한 웃음.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소극적이고 폐쇄적이고 옹졸한가 깨달았다.


어렵다고 시험포기하고 미용장 안 됐으면 어쩔뻔했지?


11일 밤 집에 도착하자 피곤이 몰려왔다. 짐만 풀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16일까지니까 아직 여유는 있었다. 12일 눈뜨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아 그동안 정리했던 대로 온종일 퇴고했다. 오후 8시 드디어 소설을 완성했다. 이제 제출만 하면 된다. 복지재단 홈페이지에 들어가 로그인했다.


- 2023년 출판지원금 신청 접수는 1월 12일 오후 18시에 마감했습니다 -


16일간을 1월 16일로 기억한 어리석음이 빚어낸 참담한 결과였다. 달력에 마감일 표시를 했어야지! 후회하고 자책하느라 괴로웠지만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출판지원금은 1년 후에 다시 신청하면 된다. 하지만 제주 워크숍은 다시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 잘했어. 잘 갔다 온 거야.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잖아.


워크숍 갔다 온 지 1달이 되어간다.

지금도 회장 구호(口號)를 따르던 회원들의 연호(連呼)가 귓가에 쟁쟁하다.


- 원팀 미용장 대전지회 파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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