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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잽잽 May 30. 2023

마흔, 지금부터 다르게 살아도 돼

마흔 살의 복싱일기 -11

  나는 모범생이었다. 딴에는 반항기도 있었고 그렇게 호락호락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공부를 열심히 한 천상 모범생이었다. 내가 자란 곳은 바닷가였다. 동해바다가 아침마다 철썩대는 학교는 빠삐용의 수용소같은, 감옥이었다. 남중-남고를 이어오며 학생은 학생끼리 선생은 선생대로 누가 더 폭력적인지 누가 더 객기가 넘치는지 싸워댔고, 그 틈바구니에서 내가 택한 생존방식은 공부였다. 


  공부를 꽤 잘했다. 고등학교는 비평준화 지역 명문고였다. 1년 365일 중 추석 당일을 제외하고는 모두 학교를 갔다. 7시에 가서 밤 11시에 돌아왔다. 그런 촌동네에서 자란 내 친구들이 지금 이렇게 많이들 서울에 와있는 건 어쩌면 그렇게 많이들 때리고 맞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폭력의 힘을, 부정하지 못하겠다.



우물 안 모범생의 고백


  스무살이 될 때까지, 그게 삶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나는 부모님이 원하신 것처럼 법조인이 되고 싶진 않았다. 딱 그정도의 반항이었다. 지금 보면 별 것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인생의 사활을 건 투쟁이었다. 그 정도의 투쟁을 벌이면서 나는 꽤 별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만의 인생을 개척할 수 있는 당당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세상의 전부가 곧 공부고 서열이고 명예라는 사실을 내가 진심으로 부정한 적은 없다. 열심히 공부했으니 보상이 올 거라고 바래본 적은 없었지만, 그런 소망이 필요없을 정도로 나는 그 길을 그냥 묵묵히 걸어간 모범생이었던 것이다.


  대학시절은 나름의 좌충우돌이 있었다. 그래도 취직을 하고 꼬박 10년 정도, 그러니까 서른 후반이 됐을 무렵, 내가 가던 길의 모습과 그 한계가 여실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게 그냥 인문계 모범생에 한정된 얘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대단히 실기한 것도 없는데 인생의 비전이 보이지 않았다. 월급은 꼬박꼬박 들어오고 그걸로 서울에서 세 가족이 도란도란 살아갔는데, 이상하게도 쇠락해가는 느낌이었다. 나아갈수록 뒤로 밀리는 기분이었다. 그건 단지 아이를 낳아서 돈 나갈 데가 많아졌다거나 부동산 대출때문에 생활비 여유가 줄어들었다는 현실 그 이상의 답답함이었다. 그 현실이 오랜 시간 차곡차곡 쌓여 나를 숨막히게 한 것도 사실이지만, 내가 느낀 미래에 대한 답답함은 그정도로는 설명되지 않는 거대한 무기력과 막막함이었다.



50살, 60살의 내가 그려지지 않는 순간


  중학교 선생에게 맞을 때도, 고등학교 선생에게 맞을 때도, 대학에서 치기어린 마음으로 이런저런 활동을 할 때도 나는 '10년쯤 뒤의 나'가 어떻게 될지 걱정해본 적이 없었다. 살던대로 살아가면 살아지겠지, 은연중에 모범생의 그 나태함으로 지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런 게으른 나에게 세상이 불쑥 다가와 '너 앞으로 조심해야 될 걸?'이라고 힌트를 준 적이 있었다. 바로 군대에서였다.


  이등병 시절, 내무반에서 선임들과 축구를 하고 돌아와 샤워를 하는데 한 선임이 내 몸을 아래위로 훑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완전 어린이 몸이네 어린이 몸"


  모범생은 운동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재미로 하지 운동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스스로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내 몸은 군대에서 온갖 사람들 사이에 섞여 물을 끼얹어놓고 보니 아주 초라했다. 다들 뭘 하고 살았길래 저렇게 몸에 잔근육들이 있을까? 나는 그런 잔근육의 부재가 앞으로 내가 넓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얼마나 많은 제약을 가져다줄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미래를 상상하는 데 나이가 들수록 잔근육이 중요하다는 걸 당연히 몰랐다. 그렇게 치욕적인 경고를 이미 세상은 날려줬는데도 말이다.



육체를 쓸 줄 모르는 인생의 한계


  10년 뒤에 도무지 무엇을 재미로 살지 도무지 그려지지 않던 30대 후반, 나는 집안의 작은 고장도 고치지 못하는 어리석은 가장이었다. 전구를 갈라면 갈겠지만 덜컥 겁이 났고 문이 삐그덕대면 저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의 가장 기초적인 면에서, 나는 어린이였고 그런 어린이의 육신으로 마흔 이후의 장년을 생각해보니 무엇도 자신이 없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내 건강때문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나는 내가 지금보다 더 활동적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할 순 없는 상태였다. 


  그런 내가 복싱을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이걸 때리고 있으면, 산을 옮긴 우공처럼 조금씩 내 삶을 다른 방향으로 틀고 있는 것만 같다.

  복싱장을 다닌다고 미래가 보장되는 건 당연히 아니다. 다만 복싱장에 다닌 지 1년이 넘어서는 무렵부터, 삶에 대한 자신감을 조금씩 되찾았다. 좀더 정확히는, 하루하루에 대한 자신을 찾았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이 대뜸 몸이 단단해지고 얼굴이 좋았다고 이야기해줬다. 


  평생 엉덩이깔고 머리굴리고 입만 나불대며 살아왔는데, 운좋게 그렇게도 어영부영 시간을 잘 보냈는데, 이제는 다르게 살아야 할 것만 같다. 영원히 나와는 상관없을 것 같은 바벨도 들고 조금씩 샌드백에 닿는 내 주먹이 세지는 걸 느끼면서 지금의 삶을 박차고 다른 삶을 살게 되더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은 다른 모습의 삶이 갑자기 강요되더라도, 미련없이 지금의 삶과 단절하고 새롭게 적응해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 이따위 직장, 여기서 썩어문드러질 순 없어- 나는 새로운 삶에서 다시 피어날 수 있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랬다. 그 말뜻이 무엇인지 천하를 논할 자격이 없는 내가 헤아릴 순 없지만, 修身이 삶의 근본인 건 확실하다. 20년 공부해 20년 벌어먹고 살았으니, 예순까지의 60년을 위해 내 몸부터 일단 닦아보기로 한다. 그 뒤는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게 무엇이됐든 이 몸뚱이가 있으면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삶에 위축될수록, 몸을 뻗어 어딘가 닿아보는 일은 중요해진다. 슉슉 잽을 날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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