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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준 Sep 23. 2023

서울 정착기

사투리

겨울로 가는 목에 고향 부산을 떠나 서울로 갔다. 몇 번 서울 본사로 오라는 것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했는데 이번에는 강제 발령이었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아내와 세 살배기 딸아이를 두고 객지로 떠날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날씨도 점점 추워졌다.


회사와 가까운 오피스텔을 구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서울에 도착했다. 아내가 이끄는 대로 부동산 몇 군데를 들려 지하철 5호선의 종착역인 방화동 오피스텔로 정했다. 아내도 나를 따라 본사 근무를 요청했는데 발령이 날 때까지 서울에서 나 혼자 지내야 한다.


서울 본사로 양복 입고 첫 출근했다. 공항 현장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회사의 엘리트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행동거지와 말투가 세련되어 보였다. 부산에서 초중고대를 졸업한 내가 조금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본사 업무는 공항 현장과는 많이 달랐다. 공항 현장이 대부분 몸을 쓰는 일이라면 본사는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 머리를 굴리며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내가 버틸 수 있을지 불안했다.


처음 해보는 본사 업무와 더불어 나에게 가장 큰 걱정은 사투리였다. 서툰 엑셀과 파워포인트를 배워가며 겨우 만든 보고서를 여러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했는데, 발표 날짜가 정해지는 순간부터 당일까지 밥맛도 없고 죽을 맛이었다. 경상도 분들은 이해하시겠지만 '은'과 '언'의 발음이 영어의 'P'와 'F'처럼 의식적으로 신경 쓰지 않으면 망신당하기 일쑤다.


몇 달 후 아내의 본사 근무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딸아이는 부모님께 맡겨두고 우선 혼자 올라왔다. 아내 역시 공항 근무만 했었는데 본사 예약 부서로 발령이 났다. 예약 부서는 전화로 고객과 상담하는 일이 주 업무라서 아내도 사투리 억양이 신경 쓰였다. 한날 아내는 퇴근 후 진지한 표정으로 그날 있었던 얘기를 들려줬다. 고객의 항공권 문의 전화가 와서 아내가 상냥하게 응대했다.


"여보세요.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거기 서울 아니에요?"

"예, 손님. 서울 맞습니다."

"에잇, 아닌 거 같은데?"


그날 이후로 아내는 서울말을 학창 시절 영어 배우듯이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몇 달 후 우리 딸아이를 서울로 데려왔다. 우리 세 식구가 한 집에서 함께 살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맞벌이 하느라 딸아이를 부모님께 맡겨두고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봤었다. 오피스텔에서 나와 아파트로 옮겼다. 좀 오래된 아파트였지만 놀이터에 있는 그네를 보고 딸아이가 좋아했다. 우리 부부도 그런 딸아이를 보며 같이 좋아했다.


우리 세 식구 식당에 갔을 때다. 딸아이는 한동안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아서 그런지 사투리가 엄마 아빠보다 더 심했다. 그것도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주로 쓰시는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예쁜 우리 딸이 큰 소리로 사투리로 말하면 식당 사람들이 우리를 다 쳐다봤다. 식당이 좀 깨끗하지 못하면 우리 딸은 즉시 지적한다.


"살다 살다 이래 추줍은건 처음 본다"


이랬던 딸아이가 몇 년 후 유치원 후배들 앞에서 연설하는 졸업식 송사를 맡았다. 유창한 서울말로 아이들에게 말하는 딸아이를 보면서 우리 부부는 가슴 뭉클하고 흐뭇했다. 다른 집의 영어 잘하는 아이들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사진 by 유치원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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