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신
다시 그 시간이 돌아온 듯하다. 우리를 지치게 했던 무더운 여름은 어느새 힘을 잃어버리고, 다시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겨울로 들어가기 전의 시간, 생기로운 것들이 힘을 잃어가는 그 계절인 가을이 말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당신들은 이 계절이 기대되고 설레는 계절일지 모른다. 나 역시 몇 년 전까지는 이 계절이 정말 좋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2020년 10월 30일, 그날이 모든 것을 바꾸어버렸다. 그날 이후로, 나에게 가을이라는 계절은 우울하고, 힘든 시간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3년이 지난 2023년 10월 30일이다.
벌써 3년이 지났다. 남겨진 사람들의 시간은 빠르게만 흘러가는데, 떠나간 사람은 그대로 멈춰있다. 나는 3년 동안 많은 일들을 겪었고, 내가 사랑하는 팀 역시 많은 일을 겪었는데, 떠나간 그 사람은 변함없이 화면 속에서 웃고 있다. 3년 전 그날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데,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사실인지, 그 빈자리는 익숙해져만 간다. 수많은 사람과 함께 불렀던 그 이름을 이제는 부를 일이 점점 줄어만 간다는 것이, 점점 우리의 마음속에서 옅어져 간다는 것이 슬프게 다가온다.
2022년 10월 30일, FA컵 결승 2차전이 있던 날, 군대에서 티비를 붙잡고 긴장하며, 그리고 실망하며 경기를 보던 중에 캐스터의 한마디가 나를 울리고 말았다. “오늘 경기 서울의 선수단, 서울의 영원한 춘디치, 김남춘 선수와 함께 뛰었습니다. 서울의 4번은 오늘 마지막 풀타임을 소화했습니다.”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그날의 기억 속에서 당신과의 기쁨을, 당신과의 추억을 잊지 않겠다고 정말 고마웠다고, 그리고 이제는 편히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그 말을, 그 다짐을 잊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 4번 유니폼이 내 세 번째 FC서울 유니폼이었다. 축구를 보기 시작한 이후로, 남들은 항상 화려한 공격수를 좋아할 때, 나는 그냥 수비수가 좋았다. 빛나는 하이라이트를 받는 사람들이 아닌, 묵묵히 자신의 위치에서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이 더 멋있어 보였다. 아마 남춘이 형도 그런 모습이었던 것 같다. 자신의 위치에서, 묵묵하게 할 일을 하는, 팀에게 도움이 되는 그런 모습 말이다. 그래서 2020년 10월 31일, 남춘이 형이 떠나간 다음 날, 축구장에 가는 길에 국화꽃 한 송이를 들고 찾아간 그날, 경기장 앞에 만들어진 팬들을 위한 분향소에서 꽃을 내려놓고, 짧은 편지 한 장을 적으며 정말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경기 시작 후, 4분이 되어 경기장에 있던 많은 사람과 함께 박수를 치던 시간에도 내 옆자리 사람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경기가 끝난 후 선수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옆에 있던, 앞에 있던, 그리고 피치 위에 있던 선수들과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다. 당신이 만들어 준 내 인생에서의 흔적을 잊지 않겠다고. 당신과 함께 웃고 울었던 그 추억의 흔적을 평생 간직하며
살겠다고. 당신이 남겨둔 흔적을 지우지 않고 살아가겠다고. 근데 그 다짐이, 생각보다 쉽게 잊힌 것 같다. 아직 그날의 생각을 떠올리기 힘들고, 그날의 힘들었던 기억이 생생해서 그럴까, 나는 그냥 잊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 다시 캐스터의 멘트가 나를 일깨웠다. “놓쳐버린 가을에서 멀리 있는 봄을 생각합니다.”,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던 김남춘 선수에게 바치는 4골입니다.” 이 멘트를 들으며 아직 내가 그 기억과 흔적을 잊지 않았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몇 마디의 말로 위로를 받을 수 있음이,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릴 수 있음이 아직 내가 이전의 다짐을 잊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우리가 잊지 않고 그리워하며 이름을 외쳤던 그 시간이, 함께 외쳤던 그 목소리가 남쪽으로, 그리고 봄날에 닿았기를 염원한다. 그리고 그 시간과 목소리를 보며 미소 짓기를, 당신을 그리워하고 좋아했던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음을 지켜보며 그곳에서도 따스한 봄날과 같은 사람이길 간절히 기도해 본다. 추운 겨울을 앞둔 이 시간에 영원한 서울의 봄이었던 당신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