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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87호 선 14화

[오아시스] 선을 향해

마라

by 상경논총

어린 시절 철학자들의 사상을 모아둔 시리즈를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중에서도 난 플라톤을 다룬 책을 가장 좋아했다. 표지에 있는 플라톤은 푹신한 수염으로 흡사 예수님과 다를 바 없이 표현되어 있었는데, 대충 선으로만 그려놓은 모양새가 꽤 귀여웠다.


책의 내용은 대부분 기억에서 잊혔지만 아직 생각나는 부분이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선(線)은 진정한 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은 선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작은 점들의 군집에 불과하며, 이 점 또한 실제로는 점이 아닌 원이라고 설명하였다. 어릴 때도 창의력이 부족했던 나에게는 놀라운 발상이었다.


이 내용은 동굴의 비유, 이데아와 같은 이름으로 차후 고등학교 진학 후 철학과 윤리를 수강하며 질리도록 공부했던 부분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때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결국 선이라는 본질을 따라 하기 위해서 시도할 수 있을 뿐, 사물을 통해 본질과 동일한 것을 볼 수는 없다는 게 핵심이었다. 우리가 바라보는 사물은 모두 그림자일 뿐이며 본질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가짜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모방이라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이유는 없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꿈꾸는 것을 닮기 위해, 각자가 지향하는 관념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목표는 선(善)일 수도, 명예일 수도, 그 밖의 어떤 가치일 수 있다. 모방은 이렇듯 우리에게 행동의 기준이나 이유가 될 수 있다.


나는 종종 실패를 이유로 도전 자체를 폄하하곤 한다. 비단 나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주변에서 이러한 경우를 만날 수 있다. 완전한 결과물을 이뤄내지 못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슬퍼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린 시절 읽었던, 이 책의 내용을 상기한다.


물론 플라톤의 이론은 이것보다 더 방대하고, 심지어 내가 제대로 된 해석으로 그 내용을 삶에 적용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가진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도전한 것은 결과와 무관하게 그 가치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상을 그리며 치열한 현실을 살고 있다. 완벽한 선을 머리에서 생각하고, 불완전한 선을 그려나간다. 우리 삶은 모두 완벽한 선을 향한 모방의 과정이기에, 그 시도 자체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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