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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87호 선 15화

[오아시스] 비가 선을 그은 곳은

청완

by 상경논총

*이 글을 쓰는 데 큰 도움을 준 해준과 채원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원제 : 우산을 건낼 땐 손을 내밀어야 해)




어릴 때부터 난 비 오는 날을 싫어했다. 하늘에서 내리며 선을 긋는 비는 아무리 봐도 내가 좋아할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바로 눈 앞에서 선이 그어지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 선들은 어차피 한순간에 사라져버리고 말아서, 무의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장난감 자동차를 들고 놀이터를 뛰어다니던 꼬꼬마에서, 교과서를 들고 넥타이를 매며 학교까지 뛰어가는 평범한 남고생이 된 지금까지, 이렇게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비를 좋아하게 되는 일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비가 싫었다. 어제부터 내린 비 때문에 학교 가는 길이 온통 진흙이 되어버려 신발이 금방 더러워졌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마다 짜증이 솟구쳤다. 입안을 한참 맴돌던 욕지거리를 간신히 씹어 삼켰다. 퍼붓는 비를 뚫고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책상에 엎어졌다. 우산을 써도 바람에 날리는 비때문에 교복이 빗물에 푹 젖어버린 상태였다. 움직이기 싫었지만 젖은 상태로 있는 건 더 싫었다.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하복 셔츠를 벗어 의자에 걸쳐 두고 선풍기 근처로 자리를 옮겨 머리를 말렸다. 이미 선풍기 주변은 나처럼 젖은 몸을 말리기 위한 친구들로 북적였다. 뭐야, 우수현. 너도 젖었냐? 선풍기 가까이 다가가자 내 옆자리에 앉는 친구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살짝 털자 물방울이 떨어졌다. 금방 마르긴 그른 것 같았다. 어제 본 쪽지시험도 오늘 날씨처럼 비가 내렸다는 친구의 실없는 얘기를 들으며 선풍기를 쐬고 있자 담임선생님이 출석부를 들고 교실로 들어왔다. 모두 흩어져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나는의자에 걸쳐 두었던 하복 셔츠를 다시 입으려다가 말았다. 여전히 축축했다. 축축하고 습한 건 정말질색이었다. 별다른 공지사항 없이 끝난 조례를 뒤로하고 나는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비가 와서 그런지 시간이 잘 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왠지 오늘 하루는 길 것만 같았다.


집에 갈 때가 되어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비는 하늘에서 내리며 무수한 선을 긋고 있었다. 속으로 조용히 욕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좀 그쳤으면 좋겠다. 복도로 나가자 열려 있는 창문으로부터 바람이 들어왔다. 비 냄새도 함께 밀려왔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창가를 바라봤다. 아, 가기 싫다. 그냥 그칠 때까지 기다릴까. 나는 잠깐 멍하니 서있다가 결국 교실로 돌아왔다. 그칠 때까지만. 비가 그칠 때까지만 이곳에 머물기로 하며 책상 위로 올라가 누웠다. 언제 그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대책 없이 행동하고 싶었다. 책상 위 자리는 영 불편했다. 결국 나는 책상에서 금방 일어나 사물함 위로 올라갔다. 여긴 좀 나았다. 자리를 잡고 누워 눈을 감았다. 시간이 지나 눈을 뜰 때에는 비가 더 이상 내리지 않기를 바랐다. 팔을 눈 위에 올려놓고 잠을 청했다. 빗소리가 귓가로 흘러 들어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금방 잠에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시간이 꽤 많이 지나 있었다. 밖이 어둑어둑해져 그런지 교실 안은 깜깜했다.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가방을 챙겨 교실을 빠져나갔다. 도대체 이 비는 언제 그칠는지. 이제 그만 집으로 가자고 생각하며 우산을 필려는 찰나 내 시선 끝에 누군가 걸렸다. 저 애는 우리 반인데. 이름이 뭐였지. 쟤도 지금까지 안 간 건가. 그 아이는 가만히 쭈그려 앉아 빗속으로 한쪽 손을 뻗고 있었다. 손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그 모습을 나는 한참 동안 바라본 것 같다. 그 순간에는 바로 내 앞에서 내리는 빗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우산을 들고 그 아이에게로 걸어가 우산을 건네주었다. 그 아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 아이의 손에 우산을 쥐어 주자 조금 놀란 듯했다. 이거 쓰고 가.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집으로 뛰어갔다. 우산을 빌려준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정말 딱히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비를 온몸으로 다 맞아가며 뛰는데도 그렇게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상했지만 내가 그 이상함을 알아차린 건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비가 한참 내리던 어제가 거짓말같이 느껴질 만큼 오늘은 아침부터 강한 햇볕이 내리쬐었다. 어느 정도여야 기분 좋게 햇볕을 쬐며 가지, 이건 뭐 쨍쨍하다 못해 타 죽을 것 같았다. 갈증이 났다. 내일은 얼음물을 챙겨야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학교에 도착했다.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나는 교실을 슬쩍 둘러보았다. 어제 본 그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어제 추워 보이던데 감기라도 걸린 걸까. 잠시 멍하니 생각하다가 이내 교탁 앞으로 가서 출석부를 살짝 넘겨보았다. 정하연. 어제 본 그 아이의 이름이었다. 예쁜 이름이었다. 타는 듯한 갈증에 옆에 있던 친구에게 물을 넘겨받아 마셨다. 그래도 갈증은 여전했다. 무더운 날씨에 지친 나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책상에 엎드렸다. 아까 본 그 아이의 이름을 떠올렸다. 정하연. 그 이름을 입안에서 한참을 굴렸다. 입안이 달았다. 더 이상 갈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1교시 수업 시작 전 누군가 엎드려 있던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고개를 드니 내 앞에 우산이 내밀어졌다. 정하연이었다. 고마웠어. 나에게 우산을 건네는 표정만큼이나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약간의 떨림이 너의 얼굴에서 언뜻 보이기도 했다. 우산을 받아 드니 정하연은 곧바로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아니, 스쳐 지나가려 했다. 내가 너를 잡기 전까지는. 충동적이었다.다분히 충동적이고 나조차도 이유 모를 행동이었다. 그냥 말을 걸고 싶었고 그냥 그러고 싶었다. 정하연을 잡고 내가 무작정 던진 말은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너 내 이름 알아?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내가 봐도 너무 유치했던 나의 물음에 돌아온 너의 답은 뜻밖이었다. 넌 내 이름 알아? 나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졌다. 답이 늦어지면 정하연이 바로 가버릴까 봐 불안했다. 알아. 정하연이잖아 너. 약간의 정적이 우리를 감쌌다. 나도 너 이름 알아. 우수현. 나는 작년부터 알았어. 정하연은 미소와 함께 그 말을 남기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자리에 앉는 너의 모습을 계속 힐끔거렸다. 내게 보여준 미소가 계속 떠올랐다. 정하연을 잡았던 손이 화끈거렸다. 오후가 되자 비가 내렸다. 비가 내려도 기분이 엉망이 되지 않았다. 정하연이 그렇게 만들었다. 비가 아니라 정하연이 더 신경 쓰였다. 내리는 창밖의 빗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비는 떨어지며 어디에선을 그었나. 그어진 선들은 어디로 이어졌나. 그 끝이 가리키는 곳은 어디일까. 그 빗방울들은 다 어디로 떨어졌을까.


그날 이후로 나는 가끔씩 정하연을 지켜봤다. 아, 가끔이 아니라 자주. 수업을 듣는 정하연, 친구들이랑 떠드는 정하연, 책을 읽는 정하연 등 다양한 정하연을 볼 수 있었다. 묘했던 것은 자꾸 정하연과 시선이 겹친다는 것이었다. 눈이 마주칠 때면 정하연이 나를 오래전부터 지켜봐 온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착각이겠지. 너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쉬이 말을 걸지 못했다. 원래 이렇게 머뭇거리는 성격이 아닌데. 하나부터 열까지 이상한 것 투성이었다. 그중에서 확실하게 내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유난히 아침 일찍 온 날이었다. 비도 오지 않고 선선한 날씨에 기분이 좋았던 날이었다. 교실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 위에 앉아 있는 정하연이 있었다. 안녕이라고 인사해오는 너에게 당황해 어버버거렸다. 어, 어. 안녕. 한참 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옥상 갈래? 정적을 깨기 위해 아무 말이나 했다. 정말 아무 말이었던 게 문제였지만. 아니, 오늘 바람도 불고 일찍 온 김에 그냥... 내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네가 답했다. 그래.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정하연과 옥상에 올라가는 내내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옥상 난간에 기대 학교 운동장을 바라보자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좋지? 바람에 휘날리는 긴 머리 사이로 환하게 웃는 정하연의 얼굴에 시선이 오랫동안 머물렀다. 너의 시선도 내게 오랫동안 머물렀다. 긴 시간이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보던 우리 사이를 지나갔다. 자주 오자. 너의 그 말처럼 우리 둘은 곧잘 옥상에 함께 올라갔고 그곳은 우리의 아지트가 되었다. 같이 옥상에 올라가기 위해 나는 30분 일찍 일어났고 정하연은 버스를 타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정말 한여름에 가까워지던 날, 너가 나에게 물었다. 그날 왜 나한테 우산을 빌려줬어? 그냥. 나는 그냥이라고 밖에 답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나는 그 이유를 명확히 몰랐으니까. 그럼 그날은? 정하연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던 또 다른 여름날의 하루를 이야기했다. 내가 처음 우산을 빌려준 건 작년 여름날이었다고. 그때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고 했다. 기분이 묘했다. 가슴께가 점점 더 간질거렸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우산을 빌려주고 자꾸 시선이 마주치고 같이 옥상에 올라오고, 나 오해해도 돼? 내 눈을 바라보며 물어오는 너에게 나는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선명한 건 정하연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전부였기에. 너는 이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이따 오후에 또 비 온대. 근데 나는 오늘도 우산이 없어.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우산이 없다는 정하연. 웬만큼 눈치 없는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왜 나는 정하연에게 우산을 빌려줬지? 왜 정하연의 곁을 맴돌았지? 생각보다 답은 간단했지만 그 답을 인정하기는 꽤 어려웠다. 그리고 이 사실을 그 당시의 나는 몰랐다. 시간은 금방 흘러갔고 어느덧 학교가 끝나는 시간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정하지 못한 채로 가방을 챙겼다. 밖엔 비가 오지 않았다. 오지 않으니까 갈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근데 왜 가고 싶을까.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나였다. 나조차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무엇을 바라는 걸까. 정하연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걸음을 재촉하며 학교 밖으로 나섰다. 도로변을 한참을 걸었다. 내가 못 보는 것이 뭘까. 사실 이렇게 고민하는 것은 감정의 확신에 있어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 나의 감정을 깨닫게 해주는 것은 의외로 굉장히 작고 소소해 무심코 지나쳐왔던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비 같은. 갑자기 비가 내렸다. 허공에 선을 그으며 떨어지는 비를 보며 그 아이를 떠올렸다. 아, 그제야 깨달았다. 비가 선을 그은 곳은, 빗방울이 선을 그으며 떨어진 곳은 내 마음이었구나. 여느 해와 달리 올해는 한 발짝 늦은 여름에 장마가 시작되었다.


나는 내리는 빗속을 달려갔다. 수많은 선들이 허공에 그어지며 날 가로막는 기분이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목적지는 한 곳이었고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정하연. 목적지를 알아보지 못해 숱하게 돌아갔고 멀리 돌아왔다. 이제 머물 시간이었다. 너에게 우산을 건네주었던 그 순간이 시작이었고 어쩌면 그날의 나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결국 너를 찾아가고 말거라는 걸. 어쩌면 우리의 시작은 내가 기억하지 못한 작년의 여름날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이어져있었을지도. 새삼스럽게 너와 내가 특별한 인연처럼 느껴지고 우리가 운명인 것만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마음 한켠에서 새어 나왔다. 학교 정문에 다다를 때쯤 달리던 발을 멈추고 걷기 시작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찼다. 학교 건물에서 나오는 정하연의 모습을 보니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정하연 앞까지 계속 걸어갔다. 정하연은 자기가 했던 말대로 우산이 없었다. 비를 맞는 정하연에게 내 우산을 기울여 씌워주었다. 정하연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온 몸이 비를 맞아 젖어가고 있었지만 빗방울 대신 정하연의 시선만 느껴졌다. 비에 무감각한 나라니. 나를 이렇게 만든 정하연에 대해서는 더 이상 고민할 이유도, 시간도 없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늦어버릴 것 같았다. 쫓기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괜히 조급해졌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다. 머릿속이 엉킨 느낌이었다. 우수현, 나한테 우산 주러 온 거야? 너를 앞에 두고 머릿속이 새하얘져 한참 머뭇거리던 나를 보던 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우산 주러 온 게 아니라 씌워주러 왔어. 같이 쓰고 싶어서.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이렇게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우수현, 수현아. 너가 나를 불렀다. 내 이름을 부르는 너의 목소리를 듣자 그냥 내 마음을 너에게 다 말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무작정 쏟아내고 싶었다.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데에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것 같은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처음 너에게 우산을 주었던 순간처럼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러지 않기에는 이 순간의 나의 마음이 벅차서, 그래서 더 이상 꾹꾹 누르기에는 힘들어서. 그뿐이었다.


너와 내가 영화 속의 주인공 같은 시간을 보낸 것도 아니었고, 너와 있던 순간들이 거창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았고, 이 감정이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지만


좋아해. 이거 하나만큼은 너무나도 선명해.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어.



비가 그어준 선(線)이 맞닿아 연(緣)이 되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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