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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90호 시작 15화

[오아시스] 싱거운 스물, 담백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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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경논총

십대의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바로 스물이다. 풋풋하고, 꿈과 열정이 넘치고, 아직 서투르나 희망차고, 두근거리는 사랑이 움터오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스무 살은 시작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나이처럼 보였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십대의 끝자락 즈음엔 ‘스무 살이 되면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마치 동굴에서 100일 간 지내다 사람으로 변한 곰 이야기처럼.


그런데 어라? 내 스물은 어째 들은 것과는 조금 달랐다. 설렘과 함께 이십대의 문을 열어 젖혔는데, 그 앞에 서 있는 건 풋풋함이 아닌 어색함, 두근거리는 사랑보다는 당황스러운 실연이 먼저였다. 당당하게 스물에 맞서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 혼자만 녹아들지 못하고 겉도는 기분도 들었다. 이렇게 있을 수 없다며 이것저것 계획도 세워 보았지만, 결국 스물의 열정보단 대학생의 나태함이 더 강하다는 걸 실감했을 뿐이었다. 턱까지 차오르는 아홉 수를 어떻게 빠져나왔는데, 난 애 같은 애에서 애 같은 어른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상상 속의 스물과 나 사이의 거리는 멀어져만 갔다. 캠퍼스의 어색한 공기에도 시간은 흘러만 갔고 무료한 나날 속에서 스물의 환상도 점점 희미해졌다. 그렇다고 환상을 완전히 놓아준 건 또 아니라, 가끔씩은 괜한 심술보가 터지기도 했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밤 늦게까지 도서관을 나오지 못하던 어느 날, 옆자리의 친구에게 내 스물이 너무 싱겁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공부가 하기 싫어서 심술이 돋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저 뱉은 이야기에 재미있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색한 나날이 싱겁긴 하지만, 그 속에서 나만의 추억과 의미를 쌓아가는 게 담백한 재미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신기했다. 시작의 낯섦은 혼자의 일이 아니었다. 다들 밍숭맹숭한 환경 속에서, 각자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확하게 무엇인지도 모를 상상 속의 거창한 사건은 없었지만, 작은 추억들이 모여 나도 모르는 사이 나만의 스물을 그리고 있었다.


모든 게 서투르고 불안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시간들. 모두가 처음 겪어 본 자유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소소한 이야기를 엮어왔다. 그리고 그 별거 없는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들 왜 스물을 사랑하는 지 알 것만 같다. 어쩌면, 스물 그 자체 보다 별거 없이도 두근거릴 수 있었던 시작을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스무 살을 보냈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안 봐도 뻔하지, 별것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물을 이야기할 때면 눈이 방긋방긋 빛나는 게 너무 즐거워서, 나는 스무 살 이야기가 좋다. 설렘과 불안함, 낯섦과 서툶이 겹친 시작 속에서 느껴지는 반짝임도 좋다. 그리고 앞으로도 당연히, 스무 살 이야기는 계속 좋아할 것이다. “별 이야기는 아닌데,”하고 이어지는 그 아름다운 시작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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