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끼미 Oct 24. 2024

대만 여름, 정말 지독하다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1#27

타이난 여행을 다녀온 다음 날 아침, 눈을 떴는데 몸이 이상했다. 몸에서 뜨끈뜨끈하게 열이 나고 머리가 멍- 하고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과음한 것도 아닌데 속도 울렁울렁거렸다. 눈을 뜨고 있는 것도 힘들어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내 몸이 매트리스와 함께 저 아래로 푹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누가 나 몰래 마취 주사를 놓기라도 한 건지 일어나도 싶어도 몸에 힘이 안 들어갔다. 정말 이상했다.


온몸에 열나고 기운 없고 속 울렁거리는 증상...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증상이었다. 바로 '中暑'였다. 몇 달 전 한국인 선생님께 중국어 과외를 받던 시절, 中暑(중쑤)라는 단어를 배운 적이 있었는데, 한자 그대로 '더위(暑) 중(中)'을 나타내는 中暑(중쑤)는 '더위 먹었음'을 의미하는 중국어 표현이라고 했다. 내가 더위를 먹어본 적이 없다고 하니 선생님께서 中暑(중쑤)의 증상을 말씀해 주셨었는데, 그때 들었던 증상들이 딱 나였다.


도저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어 오후 2시까지도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힘 없이 가만히 누워 있으니 할머니가 되어 기력이 쇠하면 이런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도 더위로 유명한 대프리카(대구) 출신이지만 더위를 먹는다는 게 이런 건지는 처음 알았다. 예전에도 여름에 대만으로 여행을 온 적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이게 대만의 '진짜 여름'이었다.


다행히 저녁에는 기운이 돌아와 몸의 열기를 빼줄 김치말이 국수를 해 먹었다. 다행히도 저번에 신베이에 있는 '한국인의 거리'에서 사 온 냉면육수가 냉동실에 하나 남아 있었다. 육수 얼음 동동 띄운 국수에 역시 같은 날 사온 신김치 그리고 아삭한 오이를 함께 먹으니 냉탕 부럽지 않았다. 내 생에 가장 시원하고 가장 간절했던 김치말이 국수였다.


대만의 지독한 더위를 물리처준 김치말이 국수와 녹두 스무디


다음 날 나는 또다시 더위 먹을 각오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어학당 개강과 알바 시작이 겨우 이틀 밖에 남지 않았으니 집에 갇혀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몸보신이 필요한 것 같아 우삼겹 들어간 대만식 냉면인 '량미엔(涼麵, 중화면에 참깨 소스를 넣고 비빈 것)'을 먹고, 후식으로 녹두 스무디인 '뤼또우샤(綠豆沙)'를 사 마셨다. 우리나라 카페에서 파는 얼음 스무디처럼 그렇게 '아, 시원~하다'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비비빅맛 나는 스무디와 진한 흑당 맛이 나는 쩐쭈(버블)를 먹으니 집 나간 정신머리가 좀 돌아오는 듯했다. 이열치열 녹두 삼계탕도 좋지만 그래도 역시 시원한 음료가 효과 직빵이다. 이래서 대만 사람들이 뤼또우샤를 사랑하는구나. 


대만식 전통 아이스크림

더위를 식히는 데 좋다는 녹두의 힘으로 타이베이를 돌아다니다 보니 다시 더위가 내 몸을 잡아먹으려는 느낌이 들어 이번에는 시원함의 그 자체인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갔다. 대만식 전통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이었는데, 평소 아이스크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이곳의 아이스크림은 정말로 특별했다. 우선 배스킨라빈스 같은 곳에서 보던 아이스크림과 완전 다르게 생겼는데 통에 담긴 작은 얼음 덩어리들이 마치 거대한 빙하를 갈아놓은 것 같아 보기만 해도 시원했다.


이곳의 아이스크림은 맛도 특별했다. 열대 과일의 천국 대만답게 파인애플과 리치, 용안 맛이 있고 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땅콩과 타로, 녹두 맛도 있었다. 고민 끝에 상큼할 것 같은 파인애플(鳳梨) 맛과 내 최애 타로(芋頭) 맛을 골랐는데, 특히 타로 맛은 지금껏 살면서 먹어본 아이스크림 중에 제일 맛있었다. 꾸덕한 식감에 타로 특유의 녹진하고 구수한 맛이 진하게 느껴져 아이스크림이 아닌 뭉게구름을 퍼 먹는 것 같았다. 파인애플 맛은 기대와 달리 상큼보단 시큼에 가까워서 조금 아쉽긴 했지만 타로의 텁텁함을 가시게 해주는 고마운 맛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먹다 보니 대만에서 여름을 보낸다는 게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내에 자리가 없어 지글지글 끓는 밖에 서서 먹어야 했지만, 나처럼 가게 앞에 서서 또는 각자의 오토바이 위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즐기는 대만 사람들을 보니 이거야말로 대만이라는 나라의 여름을, 그리고 그 계절을 보내는 대만 사람들의 일상을 제대로 경험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나는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를 대만의 '찐 더위 중'에 있었다.






대만식 전통 아이스크림 가게 <北門鳳李冰>


녹두 스무디 가게 <清水茶香(饒河店)>

* 녹두 스무디는 대만의 야시장이나 일반 음료 가게에서도 판매

이전 26화 마라 먹고 염라 앞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