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1#25
統一證號(통일번호) A9002*****.
드디어 내게도 대만 신분이 생겼다.
어학당 수업이 시작되는 9월 1일, 알바도 그날부터 바로 시작하기로 했다. 네이버 카페에서 구한 한식당 알바였는데, 월급을 받으면 넣어둘 통장이 필요했다. 아무리 적은 월급이라도 현금으로 갖고 사는 건 불안했다. 그래서 외국인이 통장 만들 때 필요하다는 '통일번호'라는 걸 만들러 갔다. 어느덧 대만에 온 지 116일째 되는 날이었다.
대만의 '통일번호(統一證號)'란 대만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 부여되는 신분 번호로, 우리나라의 '외국인등록번호'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대만에서 합법적으로 거주 중인 거류증(일종의 시민권) 없는 외국인이 은행 계좌를 개설할 때나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때 신분을 증명하려면 이 통일번호가 필요했다. 어떻게 보면 조금 귀찮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행정 업무를 내 손으로 처리하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기에 걱정되면서 설레기도 했다.
통일번호는 이민소(利民署)에 가서 신청해야 했는데, 타이베이의 이민소는 시먼과도 가까운 시아오난먼(小南門)역 근처에 있었다. 대만의 이민소는 ‘이민’이라는 명칭처럼 이민 관련 업무를 진행하기도 하지만 꼭 이민이 아니어도 외국인의 출입국 관리와 대만 내 거주 중인 외국인에 관한 전반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곳이었다.
대만에 와서 이런 행정 업무는 처음이라 엄청 긴장했었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아주 간단하고 빨리 끝났다. 친절한 직원분의 안내를 받아 대기 번호표를 뽑고 중국어 공격에 혼미해진 정신으로 힘들게 신청서를 작성했고, 그러다 보니 내 차례가 되어 창구에 가서 작성한 신청서와 여권, 여권 사본을 제출하고 잠시 기다리니 금세 직원분께서 종이 한 장을 건네주셨다.
'中華民國統一證號基資表(중화민국통일번호기자표)', 바로 통일번호가 적힌 종이였다. 얼핏 보면 그냥 A4 용지 같지만 한국에서 온 외국인인 내가 대만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아주 소중한 것이었다.
겨우 알파벳 하나와 아홉 개의 숫자로 된 번호를 부여받았을 뿐인데 새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조금은 덜 이방인이 된 듯한 기분도 들고, 대만이라는 나라가 나라는 사람을 받아줬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다만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 신청서에 중국어 이름을 쓰는 칸이 있었는데 아직 중국어 이름이 없어서 그냥 내 한자 이름 그대로 적었던 것이다. 물론 애초에 한자이니 이대로 써도 되지만 이왕이면 새로운 이름을 갖고 싶었다. 내 이름을 중국어로 읽으면 ‘삐롱(birong)’인데 발음이 어렵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좀 웃겼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만 사람에게 내 이름을 소개할 일이 없어서 중국어 이름 짓기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하나 지을 걸 싶어 못내 아쉬웠다.
소중한 종이를 품에 안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비록 반쪽짜리(사실 그보다 더 적을 지도)긴 해도 대만 정부로부터 대만의 구성원으로 인정 받았으니, 이런 날은 대만 사람들의 소울 푸드를 먹어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건 바로 우육면(牛肉麵). 이민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먼 쪽에 '푸홍 뉴러우멘(富宏牛肉麵)'이라는 찐 현지인 맛집이 있다길래 한달음에 달려갔다. 1949년에 문을 열었다는 푸홍 뉴러우멘은 대만 갬성이 물씬 나는 노포였는데, 혼밥하는 중장년 아저씨 손님들로 가득해서 여기가 종로의 어디 순대국밥집인가 싶은 곳이었다.
큼직큼직하게 썰린 대파가 가득 올라간 우육면은 분위기만큼이나 친근하고 부담 없는 맛이었다. 깔끔한 고깃 국물과 부드러운 소고기, 구수한 시래기 그리고 탱글탱글한 면의 조합이 좋았다.
특히 뜨끈한 국물을 먹으니 어젯밤부터 잔뜩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대만 사람들이 찜통에서 쪄지는 수육이 된 것 같은 이 한여름에도 살얼음 낀 냉면이 아니라 뜨거운 우육면을 먹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중요한 일을 치르고 우육면 먹는 나, 제법 '대만 사람' 같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