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1#28
대만에 입국한 2021년 5월 말부터 어학당 개강 전인 8월 말까지의 3개월, 이른바 '제1막' 또는 '시즌1'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 시기는 그야말로 지옥에서 사는 기분이었다. 하필 대만에 입국하자마자 심각해진 코로나 사태로 인해 어학당 수업, 알바, 여행, 대만 친구 사귀기 등 잔뜩 기대했던 '대만 워킹 홀리데이'의 모습 중 어느 하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더위로 잠을 깨우고 매일 오후마다 장대비를 쏟아붓는 대만의 여름 날씨는 지옥불을 더 활활 불타오르게 했다. 매일 '내 인생은 죽을 때까지도 되는 게 없구나' 하며 스스로 만든 감옥 속에서 말라갔다.
그래도 나는 버텨냈다. 매일 밤마다 울면서도 주어진 하루하루를 어떻게든 보내다 보니 대만에 두 발을 딱 붙인 채 무사히 긴 여름을 버텼다. 매일 아침 일어나 요가 수련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고, 언젠가 사귀게 될 대만 친구를 생각하며 방구석에서 혼자 중국어를 중얼거리며 연습했고, 어떻게든 대만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어 땡볕 아래 1시간을 걸으며 아침 시장을 들락거렸고, 전기세가 무서워 에어컨을 못 트는 대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있는 '찌아르푸(家樂福, 까르푸)'로 달려가 신기한 대만 음식들을 구경했고, 우연히 찾은 강변 공원에서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 보며 답답한 마음을 해소했다.
그럼에도 내 마음을 나도 어쩔 수 없는 날들이 많았다. '내가 여기서 지금 뭘 하고 있나?'라는 자조적인 질문은 수시로 나를 찾아왔다. 그렇게 기분이 축 가라앉는 날에는 아침 시장에서 사온 망고를 까먹으며 '한국 가면 비싸니까 대만에서 실컷 먹고 가야지'라고 다짐했다. 쓸쓸한 밤에는 안 먹어봤던 대만 맥주와 처음 먹어보는 대만 과자, 때로는 지파이(鷄排, 대만식 닭튀김)를 먹으며 다음주에는 다른 맥주와 과자, 다른 가게의 지파이를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걷다 걷다 골반이 시린 날에는 유바이크(서울의 '따릉이' 같은 대만의 공공 자전거)를 빌려 타고 도로 위를 오토바이 무리와 함께 질주하며 언젠가 대만 친구의 오토바이를 얻어 타 보는 미래를 상상했다. 쓸데없는 생각들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순간이면 어김없이 대만 드라마 '상견니(想見你)'를 보며 '어쩌면 대만에 있는 동안 허광한을 만날 수 있을 지도?'라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렇게 두 달을 버티니 조금씩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트 대신 루이사(대만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카페)로 달려가 시원한 에어컨 아래 대만 사람들 사이에서 카공을 할 수 있게 됐고, 매일 방구석에서 혼자 먹던 밥도 식당에서 누군가와 함께 먹을 수 있게 됐다. 답답했던 동네를 벗어나 옆 도시로 떠날 수 있게 됐고, 중국어 공부를 하며 한 달 뒤 시작될 어학당 수업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운 좋게 구한 한식당 알바를 앞두고 '내가 과연 대만 사람들의 주문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고 걱정되기도 설레기도 한, 상상이면서도 곧 현실이 될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됐다. 타죽을 것 같은 여름의 대만에 굴복해 캐리어를 싸들고 한국으로 돌아갔더라면 결코 맛볼 수 없었을 희망이었다. 견디고 버틴 자에게 주어진 보상과도 같은 희망.
대만에서 살았던 일 년 중에서도 이 세 달이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고독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살아보는 게 처음이기에, 이렇게 철저히 혼자가 되어본 건 처음이었기에 어찌 해야 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이 시기를 보내며 이 낯선 곳에서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을지, 무엇이 나를 즐겁게 해주는지 배운 덕분에 이후에도 외톨이로 지내면서도 덜 방황하고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어떤 계절도 이 여름보다는 덜 고통스러웠고 그 어떤 순간도 이 3개월보다는 자유로웠으니까. 역시 사람은 깊은 바닥을 경험하고 나면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된다는 세상의 진리를 이때 배웠다.
결국 나를 지옥에서 건져올린 건 바로 '나'였다.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라도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작은 행복을 찾아 나섰던 '나 자신'이 나의 구세주였다. 좋아하는 장소를 찾아가고 좋아하는 행위를 하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매일 매일의 '좋음'들을 쌓아갔고, 지극히 짧지만 기분 좋은 순간들이 모여 하루 하루가 즐거워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 대신 '내일은 또 어디를 가볼까?', '내일은 어떤 맛있는 걸 먹지?'라는 기대가 머릿속을 차지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는 마음이 '내일도 분명 재밌을 거야'라는 희망을 무럭무럭 키워낸 것이다. 아주 기특하게도.
그래서 대만의 뜨겁고도 강렬했던 그 해 여름을 잘 견디어준 나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때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진짜 워킹 홀리데이'를 경험할 수 있었고,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버텨준 덕분에 이후 삶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된 순간들을 맞이할 수 있었고, 혼자서도 살아준 덕분에 대만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자화자찬이라도 꼭 이때의 나에게 말하고 싶다. 참 잘했다고, 버텨줘서 고맙다고.
2021년 8월 8일 새벽 1시
이제 즐거움을 위한 다섯 번째 노력할 시간이다.
즐거운 생각하면서 푹 잘자기!
사실 아까 맥주 마실 땐 또 온갖 생각들이 다 들어서 구구절절 그동안의 일들을 다 썼다가
쓰면 쓸수록 걱정만 늘어나는 것 같아서 그냥 다 지웠다.
지난 날에 대한 후회 대신, 미래에 대한 걱정 대신
지금 내가 당장 할 일은 대만에서 주어진 이 시간을 잘 보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