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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미 Nov 04. 2024

오늘도 대만은 폭우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1#30

비를 싫어한다. 특히 더운 여름에 내리는 비는 딱 질색이다. 꿉꿉한 것도 싫고 신발이며 양말이며 다 젖는 것도 싫다. 온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저기압을 느끼며 하루를 축 가라앉은 기분으로 보내는 것도 유쾌하지 않다. 그랬던 내가 매일 비가 쏟아지는 대만의 여름을 보내며 비를 싫어하지 않게 됐다.





대만의 여름비, 그 속의 선물


2021년 여름, 대만에는 이례적으로 비가 많이 내렸다. 하필 내가 살았던 그 여름에 대만 근처로 태풍이 많이 지나가는 바람에 타이베이를 기준으로 7월에는 20일, 8월에는 18일이나 비가 내렸던 것이다. 아무리 장마로 단련됐다지만 아침저녁 가리지 않고 두 달 내내 퍼붓는 대만의 장대비는 봐도 봐도 놀라웠다. 원래도 싫어하던 비였지만 대만의 비는 더 싫었는데, 이 시기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산책마저 이놈의 비가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에 시달리다 보니 언젠가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비가 오는 것보다 비가 안 오는 게 더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특별하고도 소중한 날이면 무작정 신발을 챙겨 신고 거리로 나섰다. 나가서 어디로 사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지만 고민할 시간도 아까워 일단 대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목적지도 동행도 없지만 짙은 회색의 하늘 대신 파란 하늘 아래를 걸을 때면 땀으로 눈이 따가워도 행복했다. 팔다리가 까맣게 타버릴 것 같아도 그저 좋았다. 햇빛이라는 게 이리도 소중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길어야 일주일 남짓한 장마 시즌을 겪어온 한국인은 그제야 깨달았다.


대만의 여름 비는 타지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한국인의 건강도 챙겨줬다. 당시 나는 수많은 걱정과 고민, 밤새 식지 않는 더위로 몇 달째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었다. 8시간은 자야 잔 것 같던 내가 5시간 자면 많이 잔 편인 시절을 살아간다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만에 태풍이 상륙했다. 태풍은 열대 바다에서 몰고 온 비를 종일 퍼부으며 뜨겁게 달궈진 공기를 시원함을 넘어 쌀쌀할 정도로 식혀줬는데, 그날 나는 모처럼 중간에 한 번도 깨지 않고 8시간을 내리 잤다. 대만에 온 지 3달 만에 처음이었다. 그날의 꿀잠으로 나는 태풍의 존재 이유와 인간을 죽이면서도 살리는 자연의 섭리를 깨달았다.


비가 해결해 준 것은 수면 장애뿐만이 아니었다. 산책‘도’ 못하게 하는 비가 원망스럽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던 사실과 관련 있다. 그 당시 내 영혼을 잠식하던 불안이라는 녀석은 나를 잠 못 이루게 하기도 했지만 매일 걷지 않으면 병이 날 거라며 나를 겁주고 있었다. 걷기가 최고의 운동이라고는 하지만 문제는 그때가 가만히 있어도 숨 막히는 여름이었다는 것이고, 더 심각한 문제는 나의 두 다리가 성치 않았다는 것이다.


원래도 많이 걸으면 골반 언저리가 아프고 발바닥과 발목이 아팠다. 그런데다 타이베이에 온 뒤로 근 두 달 동안 날마다 만 보, 만 오천 보, 때로는 이만 보를 걷다 보니 아무리 느릿하게 걸어도 삐그덕 대는 골반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스트레칭을 하면서도 ‘나는 왜 이러고 있나’ 하면서 울었는데, 그러면서도 밖에서 걷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초조함이 나를 깊은 통증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침부터 비가 오면 솔직히 좋았다. ‘비 와서 못 나가는 거니까 괜찮아’하며 그 어떤 죄책감 없이 망가져 가는 내 하체를 푹 쉬게 해 줄 수 있었으니까. “일 년 밖에 없으니 나가서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해”라는 이상한 강박에 시달리던 나를 대만의 여름비가 구해줬던 것이다. 어쩌면 나는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상태’에 대한 핑계가 절실히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잊지 못할 빗속의 사나이


생각지 못한 깨달음과 휴식을 선물해 준 대만의 비였지만, 그럼에도 늦게까지 도무지 좋아지지 않았던 비도 있었다. 해가 쨍쨍하던 날 나선 나들이에서 예고 없이 마주치는 스콜이었다. 아열대 기후인 대만답게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한바탕 스콜이 퍼부었는데, 대개는 적당히 내리다 적당한 시점에 그쳤지만 어딜 가나 적당히를 모르는 존재가 있는 법이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스콜


한국에 너무나도 가고 싶던 어떤 날이었다. 비행기라도 보면 향수병이 나아질까 싶어 이착륙하는 비행기를 가까이에서 실컷 볼 수 있다는 송산 공항 근처의 한 장소로 찾아갔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을 골라 야심 차게 갔지만 코로나로 인해 할 일을 잃고 활주로에 주차되어 비행기들만 먼 발치에서나마 보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작은 공원을 지나 한 10분쯤 걸었을까, 주변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만에서는 매일 있는 일이지만 그날따라 빗방울도 굵고 바람도 세게 불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건물 처마 아래로 몸을 숨기고 멍하니 비 오는 사거리를 바라봤다. 도로 위에 금세 빗물이 차올랐다.


땅으로 내리꽂는 장대비, 사방팔방 물을 튀기며 달리는 버스와 자동차들, 언제 꺼내 입었는지 모를 우의를 입은 오토바이 운전자들, 그리고 자전거를 탄 사람... 자전거? 그랬다. 이 엄청난 폭우 속에 자전거를 탄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한 손에는 샛분홍 우산을 든, 분홍색 우의를 입은 한 사람.

이 비를 뚫고 자전거를 탄다고? 잠깐 기다렸다 비가 그치면 가도 될 텐데 굳이 지금 간다고? 매일 있는 일이라 이 정도 비는 비도 아닌 걸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멋있어 보였다. 이 거센 비에도 멈추지 않고 페달을 밟으며 나아가는 그 모습이 참 용감해 보였다. 처마 아래에 숨어 비가 멎기만을 기다리는 나와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요즘도 가끔 길을 걷다 비를 만나면 이날의 사거리가 생각난다. 잠깐 비를 피할까 싶다가도 그때의 폭우에 비하면 이 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다음 걸음을 내딛는다. 살다 보면 이런 장대비는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야 한다. 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아무리 거센 비도 언젠가는 멎을 테니까.




(감사의 말씀)

안녕하세요, 끼미입니다.

이번 글은 <대만에 살러 갔습니다> 시즌 1의 마지막 글입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시즌 2로 돌아오겠습니다.

긴 시간 동안 제 이야기를 들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평온하고 따뜻한 가을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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