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1#29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코로나 시국, 아무도 없는 대만.
아무리 혼자 애를 써도 그들이 없었다면 아무런 힘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2020년 10월 29일 (목)
아무도 날 진심으로 이해해주지 않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쉽게 내뱉을 뿐이다.
내 생각은 아무도 해주지 않는다.
대만으로 떠날 결심을 했던 2020년의 10월 말.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대만으로 떠났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그곳에서는 외로운 게 당연하니까, 내 성격이 이상해서 친구가 없다는 자책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대만에 떠나고 나서야 알았다. 나의 외로움은 친구가 없어서가 아니라 혼자 아픔을 안으려 했던 나 자신 때문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중국어 수업을 듣지도, 여행을 다니지도, 대만 친구를 사귀지도 못하고 더위에 지쳐가던 대만 워홀 초기. 그 시기를 무사히 견딜 수 있었던 건 내가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쉐어하우스에 같이 살던 하우스메이트도 이사를 나가고 넓은 집에 혼자 남겨졌지만 그래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나에겐 몇 안 되지만 진심으로 나를 응원해 주는 '한국 친구들'이 있었다.
특히 이 시기에 가장 많은 힘이 되어준 건 대학교 친구들이었다. 사실상 내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이 그들밖에 없어서 굳이 '대학교'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되지만, 어쨌거나 알고 지낸 지 10년이나 되었으면서도 가장 감정적으로 교류를 많이 했던 시기가 바로 나는 대만에서, 친구들은 한국에서 지냈던 이 시기였다. 정작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을 때는 임용고시 준비를 핑계로(사실은 우울한 내 상태 때문에) 먼저 연락하지 않다가 대만에 오기 전 작별의 시간을 가지면서 자주 연락을 했던 게 대만에 와서까지 이어졌다.
최소 한 달에 한 번은 가졌던 친구들과의 영상통화, 이른바 '랜선 모임'이 없었다면, 대만 생활의 징징거림을 실시간으로 토로했던 단톡방이 없었다면 나는 코로나가 잦아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타오위안 공항으로 갔을 것이다. 랜선 모임은 대만에 도착해 호텔에서 자가격리를 하던 시절부터 시작됐는데, 다들 바쁜 직장인이지만 외로운 내가 시간을 내달라고 하면 흔쾌히 카메라를 켜고 한국어로 같이 수다를 떨어주었다.
그중에서도 나에게 대만 워홀을 떠날 용기를 불어넣어 준 도로시라는 친구와 실없는 소리로 웃겨준 쩡이라는 친구들과의 모임은 랜선 모임뿐만 아니라 단톡방에서도 거의 매일 연락했다. 카톡을 귀찮아하는 내가 단톡방에서 그렇게나 매일 떠든 건 이때가 처음이었을 거다. 친구들은 저마다의 현생으로 바쁘면서도 내가 올리는 대만 사진과 소식에 실시간으로 반응을 해주었고 나의 징징거림도 들어주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순간이 있는데, 송산 공항 근처의 어떤 시장에 생선회를 사러 갔던 날이었다. 싱싱한 회가 너무 먹고 싶어서 찾아간 곳이었는데, 문제는 중알못인 내가 어종을 중국어로 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챗GPT도 없고 나의 검색 능력도 떨어져서 대만 사람들은 회로 어떤 생선을 주로 먹는지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내가 갔던 시장의 가게는 그날 들어온 생선을 종이에 적어두고 손님이 주문하는 대로 판매하는 곳이었는데, 도착했을 때 이미 줄이 어마어마해서 도대체 어떤 생선이 들어왔다고 적혀 있는지 볼 수도 없었다.
정말 다행히도 마침 그 시간에 중국에 살다와 현지인급의 중국어를 구사하는 도로시가 실시간으로 단톡방을 확인해 주었는데, 멀찍이서 카메라 줌을 당겨 찍은 손글씨 메뉴판을 보고 도로시가 어떤 생선이고 무게당 가격은 얼마인지 등을 알려줬었다. 결국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마침 가게 안에서 새로 꺼내온, 이름 모를 생선들이 있는 모듬회를 구입했지만, 아마 혼자였다면 그 긴 시간을 땡볕에서 기다리지도 못했을 거고 중국어로 주문할 생각에 지레 겁먹고 나머지 빈 손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때마침 실시간으로 번역해 주고 내 차례가 가까워지는 그 심장 쫄깃한 순간을 함께 해준 덕분에 그날 저녁 그토록 먹고 싶었던 회를 즐길 수 있었다.
또 어떤 저녁에는 도로시가 한강에 러닝하러 갔다길래 나도 한강 보고 싶다고 했더니 진짜 영통을 걸어서 한강을 보여줬었다. 타이베이에는 한강처럼 넓은 강이 없어서 물멍이 그리웠던 내게 도로시가 보여줬던 그날의 한강은 순식간에 나를 여의도 한강공원 잔디밭으로 데려다주었다. 마치 친구들과 같이 한강을 보며 치맥을 했던 그 어느 가을날 저녁처럼. 운동하러 나간 도로시에게 나와의 영통은 분명 방해가 되었을 텐데도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수고와 시간을 들여준 도로시의 마음이 한강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다웠다.
친구들이 내 한탄을 들어준 건 랜선 모임뿐만이 아니었다. 대만으로 떠날 준비를 하면서 수년 동안 죽어있던 네이버 블로그를 부활시켰었는데, 실친이자 블로그 이웃이었던 이 친구들이 내 블로그 글에도 매일 좋아요를 눌러주고 댓글을 달아줬었다. 특히 대만 워홀 초기에는 한탄이 90, (억지로 만들어낸) 즐거움이 10인 일기를 올렸었는데, 착한 친구들은 내 징징거림에 "어쩌라고"가 아닌 "그래도 잘하고 있어"라는 위로와 응원의 댓글을 남겨주었다. 솔직히 나 같으면 아무리 친구라도 매일 "망할 대만 코로나!!!"를 외치는 타인의 일기를 보고 싶지 않았을 것 같은데, 참 착한 친구들이다.
이 시기에 엄마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타지에서의 고독함, 더 깊어진 우울을 내 마음 밖으로 꺼내놓으면서 친구들과 좀 더 가까워졌다.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가끔은 ‘친구들이 볼 텐데 이렇게 솔직하게 다 써도 되나, 내 투정에 질려버리면 어떡하나’ 이런 생각도 했었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는 내가 살고 봐야겠기에 정말 모든 이야기를 다 썼었고 그 덕분에 나의 이 외로운 여정을 알아주고 응원해 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아무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 생각했지만 누군가는 진심으로 내가 잘 지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명백한 사실이자 진실이 기나긴 대만의 여름을 견디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