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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미 Dec 19. 2024

훠궈 대신 눈칫밥만 실컷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2#06

2021년 9월 11일 토요일, 언어중심 수업도 저녁 알바도 없는 자유의 날이었다. 주말이어도 보통 혼자 보냈었지만 이 날은 아니었다. 점심 약속이 있었는데, 타이베이에서 가장 핫한 동네인 중샤오푸싱(忠孝復興)에 있는 훠궈 가게에 무려 '예약'까지 해서 가기로 한 것이었다.


훠궈! 대만에 와서 처음으로 외식했던 메뉴도 훠궈였다. 코로나가 한창 심했던 시기를 지나 드디어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던 그때, 시외버스까지 타고 가서 먹었던 바로 그 훠궈, 태풍 전날 몸도 마음도 축축한 날은 먹어줘야 하는 나의 소울푸드 훠궈.


그때는 혼자였지만 이 날은 내 앞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는데, 바로 언어중심에서 만난 한국인 언니였다. 통쉐(同學, 같은 반 친구)가 될 뻔했던 이 언니는 대만에서 일을 하시다가 잠시 휴식 중이라고 하셨는데, 나보다 열 살 정도는 더 많으셨던 아주 멋진 커리어 우먼으로 기억한다.


언어중심을 다니는 게 처음이라는 언니는 대만에서 사신 지는 꽤 되었지만 이렇게 한국인을 만난 건 오랜만이라 반갑다고 처음 만났던 날 점심도 사주셨었다. 그것도 꽤나 가격이 나가는 우육면 가게에서 오이 무침과 가지 무침까지 시켜주신, 좋으신 분이셨다. 나보다 중국어가 훨씬 유창하신 언니는 우리 반을 떠나 비즈니스 반으로 옮기셨지만 후에 같이 밥 먹으면서 다음에 또 만나자고 했는데, 그다음이 바로 이 날이었다.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고 먹은 훠궈


다음날 태풍이 온다던 일기예보가 무색하게 주말을 맞은 훠궈 가게는 훠궈 냄비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후끈했는데, 1인당 548위안(한화 약 2만 3천 원)을 내고 먹은 훠궈는 기대했던 것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음, 보다 정확히는 맛이 있는지 없는지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는 게 맞겠다. 맞은편에 앉은 언니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원래도 눈치를 많이 보지만 이날의 눈치에는 이유가 있었다. 사실 언니는 다른 식당으로 예약까지 하셨다가 내가 이 훠궈 가게에 오자고 해서 변경하게 된 건데, 그 변경의 사유는 바로 돈이었다. 대만 워홀이 끝날 때까지 계속 나를 괴롭힐, 그놈의 징글징글한 돈!


언니가 예약하셨다던 그 식당의 식사 가격대는 제법 비쌌는데, 차마 거절을 못해 정신 차리고 보니 예약까지 되어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밥 한 끼에 내 일주일치 생활비를 불태워버릴 처지였다. 이미 예약까지 한 상황에서(심지어 전화로) 어떻게 하나 하루종일 고민하다가 결국 언니에게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정말 죄송하고 부끄럽지만 사정이 이러해서 솔직히 부담스럽다고.


그렇게 온 자리다 보니 식사하는 내내 언니를 계속 훔쳐보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많이 드시지 않는 언니를 보면서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입맛에 안 맞으신 건지 아니면 원래 소식좌이신지 모르겠지만, 그런 언니를 앞에 두고 맛을 제대로 음미하지도, 평소대로 우걱우걱 먹지도 못했다. 물론 돈 생각해서(또 돈이다!) 꿋꿋이 먹을 만큼 먹긴 했지만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벌써 식사를 마친 언니의 눈치를 보며 아쉬운 마음에 젓가락으로 빈 훠궈 냄비를 뒤적거리며 생각했다. '이럴 거면 언니가 가자는 곳 갈 걸, 그냥 맛있게 한 끼 먹고 며칠 또우장(豆漿, 콩물)만 먹을 걸'. 마음의 가난은 죽음을 앞에 두고도 고치기 어렵다는 걸 이날 훠궈를 먹으며 느꼈다(이러고도 또 비슷한 행동을 반복한 나는 정말 답이 없다).


네이버 파파고로 번역해서 본, 어딘지 좀 이상한 훠궈 가게 주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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