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2#08
알바 출근 3일째에 홀 영업을 개시했다. 도시락 포장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진짜' 서빙을 하게 된 것이다. 예상보다 빠른 직무 전환에 당황했지만 다행히 빨리 적응했다. 역시 난 프로 서빙러였다. 20대 때 여러 식당을 거치며 다져진 서빙 실력은 장소가 대만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주문받는 것도 우려했던 일, 즉 뭔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는 일은 없었다. 메뉴 수가 그리 많지 않기도 했고 대부분의 손님들은 메뉴판을 보면서 주문을 했다. 그러니 가끔 귀가 제 역할을 못 해도 두 눈으로 손님의 손가락 끝만 잘 주시하면 문제없었다. 주문지에 중국어로 메뉴 쓰는 것 또한 금방 익숙해졌다. 알바 오기 전 도서관에서 오른손 날이 까매지도록 깜지를 쓴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 공포스러운 순간은 따로 있었으니...
“시아오지에(小姐, 대만에서 젊은 여자를 부르는 호칭)~”
식사하던 손님이 손들고 나를 찾을 때였다.
처음 며칠은 괜찮았다. 나의 중국어 수준을 아시는 사장님께서 주방에 계시다가도 후다닥 달려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사장님이 한가하실 때도 일부러 나를 보내셨다. 중국어 바보를 제대로 돈 값 하는 알바생으로 키우기 위한 사장님의 특훈이었다. 그렇게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테이블로 달려갔던 어느 날, 난생 처음 들어보는 말을 들었다.
“크어이 쉬 시아오차이 마?”
크어이(可以)는 '할 수 있다', 시아오차이(小菜)는 '반찬', 마(嗎)는 의문사. 근데 '쉬'? 이건 무슨 말이지?
'에ㅇ_ㅇ?' 하고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손님이 방금 했던 문장을 다시 반복했다. 하지만 내 머리는 네이버 파파고(번역 어플)가 아니었다. 모르는 단어를 다시 듣는다고 갑자기 뜻을 알게 되는 기적이 일어날 리 없었다. 내 마음을 꿰뚫어 본 손님이 이번에는 반찬 접시를 가리켰다. 오뎅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내 머릿속 같았다.
이런 간단한 말도 못 알아듣는다는 사실이 왠지 (좀 상스러운 표현이지만) 쪽팔려서 사장님께 차마 여쭤보지도 못했다. 퇴근하고 집 가는 길에 찾아보니 ‘쉬’는 중국어로 '續', ‘리필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아까 그 손님은 "반찬 리필할 수 있어요?"라고 물었던 것이다. 당연히 어학당에서 배운 중국어 교재, 대만 와서도 주구장창 보고 있던 드라마 <상견니>에도 나오지 않는 표현이었다. 그야말로 ‘찐’ 실생활 단어.
중국어 초보 알바생은 그렇게 매일 저녁 바보 멍청이가 됐다. 결국 “사장님....” 하고 SOS를 청하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포크는 없나요, 바삭하게 해주세요, 계란은 반숙으로 해주세요 등등 아는 말이면서 모르는 말들이 매일 빌런처럼 나타났다. “음료수는 배 맛이랑 포도 맛 있어요.”라는 말을 못 해서 결국 냉장고에서 ‘갈아만든 배’와 ‘포도봉봉’을 하나씩 꺼내 들고 손님에게 가던 그때의 참담함을 어떻게 잊을까.
교과서도 드라마도 무용지물인 상황에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도청’이었다. 반찬을 담으면서도 귀는 주문받는 사장님 쪽을 향해 활짝 열어두는, 적극적이면서 소심한 도청. 일하는 내내 사장님과 손님의 대화를 몰래 엿들었다. 무슨 말로 주문을 받는지, 순두부 찌개를 주문하는 손님에게는 추가로 어떤 걸 물어봐야 하는지, 일행이 다 와야 들어올 수 있다는 안내는 중국어로 어떻게 하는지, 수저를 찾는 손님에게 위치를 어떻게 알려줘야 하는지... 도청한 내용으로 <식당에서 알바할 때 필요한 중국어 표현 사전>을 채워나갔다.
소심한 알바생의 도청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매일 엿듣고 따라 하고 외우다 보니 손님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이 늘어났다. 삼계탕을 주문하는 손님에게 “이거 한국에서 먹던 거랑 달라서 국물이 싱거운데 괜찮아요?”라고 물을 수 있게 됐고, 손님이 자리에 앉기 전에 “(테이블) 한 번 닦아드릴게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됐다. 여전히 “오늘은 육개장 안 드시고 김치찌개 드시네요?”라고 아는 체하진 못해도 긴장감 대신 여유로운 웃음으로 손님을 대하는 알바생으로 진화했다.
'중국어 잘 못 하는데 대만에서 알바할 수 있을까?'
대만 워홀을 떠나기 전 가장 많이 했던 걱정이었다. 알바를 구하고 나서도, 시작한 초기에도 과연 내가 무사히 해낼 수 있을지, 민폐를 끼치진 않을지 매일 출근길 위에서 염려했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이 된 기분을 느끼는 건 생각보다 비참했다. 자기 전 “주눅 들지 말자!!”라는 다짐으로 일기를 마무리해도 한 번 쪼그라든 마음은 잘 펴지지 않았다.
그래도 버텼다. 무사히 첫 월급을 받았고 이후 여섯 달 치의 월급을 받는 동안에도 손님과 의사소통이 안 돼서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었다. 거기에는 도청 작전의 도움도 있었지만, 두 사장님께서 기다려 주시고 도와주신 덕분이었다. 중국어 못 알아들어서 자괴감 든다는 바보에게 “나도 가끔 못 알아들어~”라며 무심하게 위로해 주셨던 두 사장님, 그분들의 인내심이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 전 재산을 탕진하고 강제 귀국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