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2#09
내가 했던 한식당 서빙 알바는 평일 저녁 5시 30분에서 9시까지였다. 3시간 반이라는 근무 시간이 그리 길진 않지만 꽤나 힘들었다. 기본적으로 계속 서서 있어야 하고 무거운 뚝배기를 들고 날라야 하며 매 순간 실시되는 중국어 듣기 및 말하기 시험 때문에 잔뜩 긴장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느샌가 한가득 쌓여있는 컵들을 설거지하다 보면 혼이 나가기 일쑤였지만, 사장님의 이 한 마디에 잠시 한국 갔던 영혼이 돌아왔다.
“끼미씨, 뭐 먹을래?”
처음에는 알바하는 곳에서 저녁을 안 먹으려고 했었다. 대만에 왔으면 우육면을 먹어야지, 육개장을 먹는 데 나의 소중한 식사 기회를 쓰고 싶지 않았다. 기껏해야 하루 두 끼이니까. 대만에 가기 전 워홀 후기를 찾아보면서도 한식을 먹었다는 얘기를 볼 때마다 솔직히 이해가 안 됐다. 길어봤자 일 년인데 굳이 김치찌개를? 그래서 원래의 계획은 일 끝나고 나서 볶음밥이든 지파이든 ‘대만’ 음식을 사 먹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육개장의 빨간 비주얼과 칼칼한 냄새는 고국을 떠나온 지 몇 달 된 알바생의 위장을 유혹했다. 뜨겁게 달궈진 돌솥 안에서 나물과 밥이 지글지글 비벼지는 소리는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공짜인 데다 근무 중에 앉아서 먹을 수 있다? 심지어 맛있다? 배가 불러도 먹어야 했다.
저녁 식사 타임 손님이 빠져나가고 한숨 돌릴 수 있는 8시쯤이면 사장님이 어김없이 뭐 먹을 건지 물으셨다. 그리고 나도 어김없이 외쳤다.
“라니어우탕(辣牛湯, 육개장), 따라(大辣, 많이 맵게)요!”
육개장. 나의 최애 메뉴였다. 6개월 동안 거의 3일에 한 번은 꼭 이 육개장을 먹었다. 그것도 메뉴판에는 없는 맵기인 '많이 매운맛'으로. 언젠가 내가 매운 걸 좋아한다고 하니 사장님께서 고추 하나를 썰어 넣어 주셨는데, 그게 내 입맛에 딱이어서 그때부터 무조건 따라(大辣)로 먹었다. 아무리 시원한 우거지를 넣은 우육면이 맛있어도 뜻대로 안 되는 대만 생활의 답답함을 푸는 데는 빨간 고추를 팍팍 넣은 국물만 한 게 없었다.
이 ‘매운 소고기 탕’은 우리 식당의 베스트 셀러이기도 했다. 열에 아홉까진 아니어도 열에 일곱 정도는 육개장을 찾을 정도로 식당의 '짜오파이(招牌, 간판 메뉴)'였다. 하지만 손님들의 육개장은 내 것과는 달랐는데, 열에 아홉은 ‘시아오라(小辣, 조금 매운맛)’을 주문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열에 아홉이 아니라 열에 열이었던 것 같다.
예전에는 대만 사람들이 매운 걸 잘 먹는다고 생각했었다. 대만으로 워홀을 오기 전 왔었던 네 번의 여행에서 모두 훠궈를 먹었었는데, 이곳 대만에서 ‘마라’ 훠궈를 먹으며 극도의 매운맛을 원 없이 즐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손님들에게 맵기를 물어볼 때마다 다들 “시아오라(小辣) 많이 매워요?”라며 두려운 표정을 하는 걸 보면서 진실을 발견했다. 대만 사람들은 매운 음식에 몹시 약하다.
사장님이 특별히 만들어 주신 나만의 ‘많이 매운’ 육개장을 먹으며 ‘조금 매운’ 육개장을 주문하는 손님들을 생각하곤 했다. 한국 음식은 자고로 칼칼해야 제맛인데, 이 얼큰한 맛을 모르다니 아쉽다. 고추를 씹어먹어 화끈거리는 입술을 찬물로 진정시키다 문득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아주 매운’ 마라 국수 먹고 응급실 실려 갈 뻔했던 한 달 전 그날. 이 육개장도 맵다고 하는데 그 마라 국수는 대만 사람이 먹을 수 있기는 한 건가? 대만 사람들의 '매운맛'은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