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2#11
버스가 출발했다. 단수이역에서 시의 외곽으로 향하는 버스였다. 생각보다 많은 탑승객들을 지나쳐 뒤편 창가 자리에 앉았다.
드디어 주말, 첫 휴무일이었다. ‘드디어’라기엔 고작 이틀의 수업과 출근을 수행했을 뿐이지만 석 달 내내 놀고먹다 오랜만에 바쁘게 살아서인지 금방 체력이 바닥났다. 뭐, 이틀 내내 아침 9시에 집에서 나서서 밖에서 꼬박 12시간을 보내고 깜깜한 밤에 귀가했으니 배터리 잔류 표시 등에 빨간 불이 켜질 만 했다. 게다가 낯선 환경이 유발한 긴장감은 가뜩이나 용량 적은 배터리를 평소보다 더 빨리 닳게 만들었다.
그래서 단수이에 왔다. 고갈된 에너지를 채워줄 그곳, 내가 사랑하는 바다.
단수이의 바다에는 이미 여러 번 와봤지만, 이번 바다는 좀 특별했다. 대만 드라마 <상견니>에 나오는 바다였기 때문이다. 학교 땡땡이 치고 온 남주와 여주가 낭만적인 대사를 주고받는 특별한 바다, 나의 소중한 첫 휴무일을 보낼 곳으로 일찌감치 점 찍어둔 곳이었다.
내가 대만으로 워홀을 온 이유는 중국어 공부도, 대만에서의 취업도, 대만 사람과의 결혼도 아니었다(사실 마지막은 살짝 염두에 두긴 했었다). 일 년 동안 대만에서 해야 할 일은 단지 “살기” 그리고 “<상견니> 촬영지 가보기”, 이 두 가지가 다였다.
<상견니>는 죽음 앞까지 갔던 나를 살려준 드라마였다.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나를 위로해 주고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던 대만 살이라는 꿈을 되찾아준, 그야말로 ‘인생 드라마’. 대만에 온 뒤 뭐 하나 되는 것 없던 코로나 시기에도 구글 맵에서 <상견니>에 나온 장소들을 찾아보며 버텼다. 이곳들을 다 가보기 전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버스에서 내려 구글 맵을 켜고 별 모양으로 저장해둔 바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구멍 숭숭 뚫린 블라우스와 짧은 청바지를 입어도 땀이 목선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갈수록 으슥해지는 시골길을 따라 이따금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나처럼 걸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토바이를 향해 팔이라도 한 번 흔들어 볼까 했지만 소심함이 힘듦을 이겼다. 구글 맵의 안내와 달리 20분 넘게 걸어도 계속 이어지는 길에 제대로 가고 있나 슬슬 불안해질 때쯤 저 멀리 연한 환타색 하늘 아래 푸른 빛이 나타났다. 바다였다.
海尾仔(하이웨이즈). 유명한 관광지도 아니지만 <상견니>에 나왔다는 이유로 무작정 찾아간 그 바다에는 아직 일몰 한 시간 전이었지만 벌써 인파가 제법 있었다. 단수이의 숨겨진 노을 명소라던 말이 과연 사실이었다. 잠시 멈춰 서서 양쪽 콧구멍 가득 바다 내음을 들이마신 다음 왼편으로 난 도로를 따라 걸어갔다.
휴대폰 사진첩을 열어 미리 찍어온 드라마 캡처를 확인했다. 바닷속 바위를 보면서 두 주인공이 앉아 있었던 위치를 가늠한 뒤 셀카봉을 설치했다. 엉덩이가 탈 듯 뜨거운 아스팔트 도로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었다. 수평선에서 30도쯤 떨어진 곳에서 빛나고 있는 해는 드라마 속의 회색빛 하늘보다 훨씬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했다. 비록 잘생긴 남자 주인공도, 대만에 오면 생길 줄 알았던 대만 친구도 없지만 괜찮았다. 과연 혼자 갈 수 있을까 싶었던 그 장소에 왔다는 사실이 그저 벅찼다.
커플 또는 친구끼리 온 대만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온 한국인은 열정적인 인증샷 촬영을 마치고 해안가로 내려갔다. 해변은 모래가 아닌 자갈로 덮여 있었다. 바지를 털어낼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무거운 엉덩이를 자갈 위에 내렸다. 거제 몽돌해변의 그것과 닮은 둥근 돌들은 종일 태양열을 받아 뜨끈뜨끈했다.
파도에 찰찰 부딪히는 몽돌 소리, 아득히 들리는 사람들의 웅성거림, 약간의 산들 바람. 평화로웠다. 쭉 뻗은 두 다리로 몽돌의 온기를 느끼며 퇴근 준비하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가족이 나타났다. 젊은 엄마와 두 자매였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딸들은 바다 앞에 쪼그려 앉아 돌을 주웠다가 파도에 손도 담갔다가 하며 즐거워했다.
단란한 가족을 보니 우리 가족이 생각났다. 지금과 달리 사이 좋았던 옛날의 우리 가족.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우리 가족은 여름이 되면 무조건 바다로 떠났었다. 전국 도로 지도 한 장 들고 7번 국도 따라 동해안의 여러 해수욕장을 누볐다. 바다에서 튜브 타고 놀다가 코펠 냄비에 라면 끓여 먹고 또 놀다가 텐트 안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또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내가 바다를 사랑하는 어른으로 자란 걸까?
갑자기 엄마랑 영상통화를 하고 싶어졌다. 붉게 타오르는 이 황홀한 노을을 엄마한테도 보여주고 싶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혼자 보기에 아까웠다. <상견니> OST가 나오던 유튜브를 끄고 카톡으로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엄마, 내 바다 왔어. 이쁘제?”
“그래. 이쁘네. 좋나?”
“응, 엄청 좋다.”
“주야가 좋다카이 엄마도 좋네.”
화면 속 엄마는 마치 내 옆에 앉아 있는 것처럼 활짝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엄마의 미소에 내 눈가가 몽돌처럼 따끈해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지만 기뻤다. 엄마에게 '좋다'는 말을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할 수 있어서.
짧은 영상통화였지만 바로 눈 앞의 바다도 채워주지 못하던 공허함이 조금은 메워졌다. 언젠가 이곳에 엄마랑 진짜 같이 올 수 있기를 바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다시 으슥한 길을 한참 걸어가야 하니 해가 완전히 퇴근하기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이미 만 보 넘게 걸어 두 다리가 무거웠지만 홀가분한 마음으로 버스를 만나러 출발했다.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어서 더 행복했던 첫 휴무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