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 가기 전 5시간을 보내는 방법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2#21

by 끼미


어학당 수업이 끝나는 시간은 낮 12시 10분, 알바 시작 시작은 저녁 5시 반. 점심시간 포함해서 약 5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학기 초에는 점심 먹고 곧장 도서관으로 달려갔었다. 그 당시의 나는 쪽지 시험 100점 받기, 작문 숙제 칭찬받기 등 이른바 '중국어 잘하기'라는 미션을 위해 불타오르고 있었다. 점심도 학교 근처에서 간단히 먹고 바로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며 다섯 시간을 보냈다.


열공하고 알바하러 가는 길, 초반 한 달 정도는 뿌듯한 마음으로 걸었다. 그러나 권태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수업 듣고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알바 가고,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지겨워졌다. 아마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서 현타가 빨리 왔던 것 같다. 만약 똑같이 살았더라도, 내 옆에 누군가 있었더라면 알바 가는 발걸음이 물음표로 가득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사는 거 맞아?' 하는, 회의감 가득한 물음표로.


당장 그 먹구름 낀 물음표를 환희로 빛나는 느낌표로 바꿀 수는 없었다. 중국어 공부를 놓을 수도, 갑자기 절친을 만들어낼 수도, 알바를 안 갈 수도 없었다. 대신, 잔잔한 행복의 온점으로 바꿀 방법 두 가지를 찾아냈다.



첫 번째 방법은 바로, '맛있는 간식 사 먹기'였다. 뭐든 없어서 못 먹는 먹순이에게 간식을 먹는다는 건 권태로운 일상에 곧바로 행복을 들이붓는 행위였다. 만년 다이어터라 웬만하면 간식을 먹지 않았지만, 알바 전에 간식을 꼭 먹어야 하는 이유도 있었다. '알바를 잘하기 위해서'! 알바하는 날은 12시에 점심을, 8시에서 8시 반 사이에 저녁을 먹었는데, 먹보인 나로서는 그 8시간을 도저히 공복으로는 버틸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간식을 사 먹어야 했다. 기운 없어서 뚝배기 떨어뜨리면 큰일이니까.


간식 하나만 더해졌을 뿐인데, 지루하던 일상이 제법 행복해졌다. 공부하느라 머리가 아프다가도 '오늘은 어떤 간식을 사 먹어볼까?' 생각하면 두통이 사라졌고, 날마다 다른 간식을 골라 먹으며 '매일 똑같은 날'을 '매일 새로운 날'로 만들었다. 더운 날은 쫄깃쫄깃한 버블이 듬뿍 든 차(茶)를, 고소한 게 땡기는 날은 흑당 맛 나는 건빵 과자를, 출출한 날은 두유와 연두부에 달달한 토핑을 함께 먹는 또우화(豆花)를 먹었다. 그렇게 권태기 온 워홀러에서 설렘 가득한 여행자로 다시 돌아갔다.



잔잔한 행복을 만든 두 번째 방법은 심지어 공짜였다. '공원에 잠깐 앉아있기', 그게 다였다. 어학당 수업 들었던 사범대학에서 알바했던 한식당 사이에 다안 공원(大安 公園)이 있었는데, 이 공원이 알바 가기 전 들렀던 나의 행복 충전소였다.


평일 오후의 한적한 다안 공원. 알바 가기 직전 10분 정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11월까지도 조금 덥긴 했지만, 벤치에 앉아 가만히 고요함을 느끼다 보면 이마에서 땀이 나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특히 나무들 뒤편으로 보이는, 아름답다는 말로도 부족한 해질녘의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은 마음 안에 신성함이 깃드는 기분을 들게 했다. 신을 믿지 않는 데도.


알바 가기 전 들렀던 다안 공원, 그곳에서 나는 저물어가는 해를 보며 생각했다. 매일이 지겹게 느껴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곳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즐겁게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대만이 나에게 허락한 360일, 그 한정된 시간을 저 아이들처럼 웃으며 보낼지, 아니면 인생 다 산 사람처럼 권태롭게 보낼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애석하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맛있는 간식을 사 먹고 공원에서 지금의 소중함을 되새겨도 권태기 탈출에는 실패했었다. 이후로도 틈만 나면 반복되는 매일을 지겨워하고 따분해했다. 나라는 인간은 쉽게 망각하고 만족을 모르는 존재였다.


나는 뭐가 그렇게나 지루했던 걸까? 몇 년이 지난 지금 보면 이 시간도 그저 그립기만 한데, 대만에서 보냈던 일 년 중 가장 돌아가고 싶은 순간인데. 아마 대만에서도 지속된 우울증, 워홀에 대해 갖고 있던 환상에 갇혀 그랬던 게 아닐까 하고 지난날의 내 마음을 이렇게나마 이해해 본다.


그래도 알바 가기 전 이 다섯 시간이 있었기에 깨달았다.

매일 똑같은 시간이라도 아주 작은 하나로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

매일 지루한 일상이라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는 것.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그렇기에 모든 순간은 똑같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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