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에서 만난 나무 한 그루의 교훈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2#20

by 끼미


특명: ’그’ 나무를 찾아라!


지옥불 레이스가 펼쳐진 곳은 뤄동 운동 공원(羅東 運動 公園)이었다. 40도에 육박하는 이 날씨에 에어컨 짱짱한 쇼핑몰 대신 뙤얕볕 빵빵한 공원에 간 이유는 딱 하나였다.


대만 드라마 <상견니>에 나온 '그' 나무 보려고.


<상견니> 속 '그' 나무


<상견니>에는 울창한 나무 한 그루가 여러 번 등장한다. 그 나무 앞에서 남주와 여주는 썸 아닌 썸을 타기도 하고, 다른 시간대에서 연인이 되어 로맨틱한 데이트를 즐기기도 한다.


누구에게도 말 못할 비밀을 들어준다는 '그' 나무, 꼭 만나고 싶었다. 내 안에 쌓여 있는 수많은 응어리를 그 나무에 훌훌 털어놓고 조금이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무더위를 뚫고 달려온 거였다. '그' 나무의 구멍에 대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기 위해서.


이번 이란 여행의 목표는 딱 한 가지였다. '그' 나무를 찾아서 드라마 속 장면을 따라 인증샷 찍는 것. 전날 밤에 드라마를 다시 보면서 그 나무가 나오는 장면을 캡쳐해왔다. 유유자적하게 공원 구경하다가 우연찮게 그 나무를 발견하는 순간을 상상하며.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 나무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여기가 수백 그루의 나무로 가득한 공원이었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더 큰 문제는, 다음 버스가 오기 전까지 40분 안에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잠깐만 서 있어도 반건조 오징어가 될 것 같은 이 습한 더위 속에서.




나무 찾다 발견한 나의 인간성

아무리 공원이 넓다지만 금방 찾을 줄 알았다. 워낙 성격이 급해서 평상시에도 경보 수준으로 빨리 걸으니 40분이면 후딱 한 바퀴 돌고 나무랑 사진 찍기에도 충분할 거라 생각했다. 내 급한 성격을 믿고 느긋하게 걸으며 공원과 사람들을 구경했다.


‘큰 호수가 있네, 이렇게 더운데 사람이 많네, 주말이라 가족 손님이 많네, 이 날씨에 뛰는 사람도 있다니.’


한쪽 눈으로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나머지 한쪽 눈으로는 그 나무를 찾으면서 계속 걸었다.


‘이 나무인가? 아닌데. 저건가? 아니네. 여기 돌아가면? 왠지 저기일 것 같은데. 에이...‘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땀을 줄줄 흘리며 30분을 걸어 한 바퀴를 돌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 나무는 없었다. 비슷하게 생긴 나무조차 없었다. 남은 시간은 10분. 애간장이 타들어갔다. 땀은 줄줄 흐르고, 빨리 걷느라 발목은 아프고, 버스 시간은 다가오고, 나무는 안 보이고. 애간장 타는 수준을 넘어 엄청 짜증났다.


'난 왜 이러고 있을까, 그깟 나무가 뭐라고 집착하는 걸까, 왜 사람들한테 물어보지도 못하고 혼자 성질낼까.'


전혀 짜증낼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혼자 씩씩댔다. 누가 톡 건드린 복어처럼 잔뜩 부풀어 오른 채로.




씁쓸한 빙수 한 그릇

한 시간 뒤, 뤄동 시내로 돌아온 내 앞에 빙수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쫄깃한 떡과 달달한 팥, 그 위에 얹어진 바나나 우유맛 나는 샤베트 얼음. 찜통 속에서 나무 찾느라 흘린 수분을 보충하기에 딱이었다. 조금 전까지 잔뜩 나있던 화를 달래기에도.



빙수를 먹으며 공원에서 찍은 사진들을 봤다. 다행히 ‘그’ 나무 사진도 있었다. 버스 오기 5분 전, 포기하기 일보 직전에 찍은 사진이었다. 그와중에 드라마 장면과 비슷하게 찍어보겠다고 푸닥거리던 내가 떠올랐다.


겨우 이거 찍겠다고.


헛웃음이 났다.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힘든 순간에 그 사람의 인격이 나온다던 말.

이날 나무 찾아 헤매며 발견했다. 나는 시간에 쫓기면 엄청 스트레스 받는다는 사실, 나는 쉽게 짜증내는 성격 나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성격 좀 고치자.’


빙수에서 씁쓸한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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