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2#18
나는 점점 미어캣이 되어 갔다. 나의 구세주, 허광한이 우리 식당의 단골 손님이라는 걸 알게 된 지 5주째. 알바하는 3시간 내내 목을 쭉 내밀고 내 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빨간 나무문에 달린 종이 ‘짤랑’ 하고 울리면 반찬 접시에 콩나물 무침을 담다가도 자동 반사로 문 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늘 실망했다. 그 분만 빼고 온 대만 사람들이 다 오는 것 같았다.
지난 주말에도 밥 먹으러 오셨다더니, 왜 제가 일하는 평일 저녁에는 안 오시나요. 덕후 냄새 나서 안 오시나요? 그래도 한 번만 와주시면 안 될까요?
이러다 기린보다 목이 더 길어질 것 같던 어느 날, 행주로 테이블을 닦던 등 뒤로 유독 청아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자동적으로 “안녕하세요(你好)”하며 뒤를 돌자 남자 손님 둘이 눈에 들어왔다. 남색 캡모자를 푹 눌러쓰고 하얀 마스크를 낀 남자 그리고 초롱초롱한 두 눈과 뽀얀 피부의 남자. 그중 앞에 있던 캡모자 쓴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잠깐, 어...? 저 눈.. 어디서 많이 봤는데...?
“두 명이요(兩位).”
이 목소리는... 시끄러운 줄만 알았던 중국어가 사실은 설탕처럼 달달하다는 걸 알려준 그 목소리,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의 목소리였다.
허광한이다!
“사장님 사장님, 왔어요.. 허광한.... 헐.. 어떡해요.....”
호다닥 사장님 옆으로 달려가 소곤거리는 내게 사장님은 쿨하게 말씀하셨다.
“어떡하긴 어떡해. 가서 주문 받아!!”
메모지와 펜을 들고 그의 테이블로 갔다. 그는 벽이 아닌 바깥쪽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덕분에 그의 바로 옆에 설 수 있었다. 주문은 그가 직접 했는데, 얼마나 긴장됐던지 사실 기억이 잘 안 난다. 그의 목소리는 TV에서 듣던 것보다 당도가 수십 배는 높았다는 것, 그리고 주문을 받아 적는 내 손이 호달달 떨려서 홀에 돌아와서 보니 내 글씨를 내가 못 알아볼 정도였다는 것, 그 정도만 희미하게 기억난다.
아, 주문 받던 중간에 사장님을 호출했었다. 그가 주문하면서 ‘무이’가 들어가냐고 물어봤는데 하필 내가 모르는 중국어라 사장님께 SOS를 요청했었다. 못 알아듣는 내가 좀 쪽팔렸지만, 덕분에 새롭게 알았다. ‘무이(木耳)’는 ‘목이버섯’이라는 사실을. 그는 역시 나의 중국어 선생님이었다.
그의 자리는 홀에서 설거지하는 개수대 바로 앞자리. 어쩜 자리 선정도 기가 막혔다. 컵 씻는 척하면서 힐끔힐끔 그의 뒷모습을 훔쳐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래도 너무 티 나게 보다가 맞은편에 앉은 일행이랑 눈이라도 마주치면 안 되니 간간히, 아주 조심스럽게 흘끔거렸다. 들키지 않게 신경 쓰느라 내가 컵을 씻는지, 컵이 내 손을 씻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컵을 다 씻어놓고 가게 구석에 놓아둔 내 가방을 가지러 갔다. 내 가방 안에는 지난 타이난 여행에서 챙겨 온 <상견니> 포스터가 들어 있었다. 그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된 후 한 달 하고도 8일째 들고 다녔던 그 포스터. 드디어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식사를 마친 그는 계산도 본인이 했다. 한 시간 동안 덜덜 떨었으면 이제 그만 떨 때도 됐건만, 그에게서 현금을 받아 드는 내 손은 아까보다 더 세차게 흔들렸다. 싸인 해줄 수 있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생각하며 멘붕에 빠져 있으니 옆에서 사시나무를 지켜보고 계시던 사장님이 대신 그에게 말하셨다. 얘(나) 허광한씨 엄청 팬인데, 싸인 좀 해줄 수 있냐고. 아, 역시 사장님도 나의 구세주셨다.
이때다 싶어 <상견니> 포스터 그리고 이날을 위해 포스터와 함께 매일 들고 다닌 매직팬을 그에게 건넸다. 그가 자기 얼굴 옆에 싸인을 하는 동안 나는 <상견니> 너무 잘 봤다고, 연기 너무 잘한다고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칭찬 폭격을 날렸다. 내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싸인을 마친 그는 그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하며 나에게 웃어주었다.
아아, 이제 한국 돌아가도 되겠다!
세상아, 오해해서 미안. 니가 날 버린 게 아니었구나. 그런 의미에서...
한국 가기 전에 딱 한 번만 더... 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