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1#07
귀엽다고 당근을 공짜로 주는 징메이(景美) 아침 시장,
그곳이 없었다면 나는 대만에서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밖에 나가는 것도 눈치 보이던 대(大) 코로나 시기, 외국인인 나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있었다. 바로 징메이(景美) 아침 시장(早市)이었다. 쉐하에서 멀지 않은 징메이 아침 시장은 이름 그대로 아침 7시쯤부터 정오까지만 열리는 시장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운영하는 우리나라의 전통 시장과는 달랐다. 대만에서 무더운 오후를 피해 야시장이 발달한 것처럼 아침 시장 역시 그나마 덜 더운 오전에만 잠깐 열렸다.
조금만 늦게 가면 상인들이 다 철수해버리고 없기에 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시장에 갔다. 어차피 너무 더워서 아침 7시면 알람 없이도 절로 눈이 떠졌다. 어학당 수업도 연기되고 알바도 안 하는 할 일 없는 백수 워홀러에겐 시장에 가는 건 기나긴 하루를 떼울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시장에 가면 내 최애 과일인 망고를 싸게 쌀 수 있었다. 시장에서 50위안이면 사는 망고를 마트에서 100위안이나 주고 사고 싶진 않았기에 아침부터 서둘러 나섰다.
쉐하에서 시장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걸렸는데 왕복 1시간 거리였다. 버스도 있긴 했지만 주로 걸어다녔는데, 아침이지만 이미 30도를 육박하는 더위 속에서 걷는 그 길은 땀으로 가득한 고행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걸어다녔다. 버스비가 아까웠다. 한 푼이라도 아껴뒀다가 나중에 대만 친구들을 사귀면 그때 쓰고 싶었다.
다행히 시장까지 가는 길의 풍경이 아름다워서 걸을 만했다. 한강이 떠오르는 작은 하천과 이곳이 타이베이임을 알게 해주는 101 타워를 보며 걷다 보면 어느새 시장이었다. 가끔 만난 동물 친구들의 사랑스러움도 무더운 고행길을 완주할 힘이 되어주었다.
코시국이었지만 징메이 아침 시장은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아무리 다들 외출을 삼가한다지만 식당 내부 취식이 금지되었으니 장을 봐서 집밥을 해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추측하건대 이 시기 대만에서 인구 밀집도가 가장 높은 장소를 꼽으라면 아마 아침 시장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아침 시장은 대만 사람들도 많이 가는 곳이었기에 밖을 돌아다니다 코로나 걸릴까봐 어디 가지 못했던 나도 마음 편히 드나들 수 있었다.
다들 마스크를 낀 채 말을 삼가는 분위기였지만 아침 시장에는 활기가 넘쳤다. 우습게도 그때의 나는 대만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좋았다. 대만 워홀을 온 지 몇 달이 되었지만 밥 먹으러 식당도 못 가고 어디 놀러가지도 못했기에 시장 말고는 대만 사람들을 볼 기회가 잘 없었기 때문이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익명의 사람들이지만 어떤 옷을 입고 어떤 걸 사가는지 몰래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재밌었다. 그만큼 사람과 대만이 그리웠었다.
징메이 아침 시장에 가면 공짜 당근도 받을 수 있었다. 시장 안에는 파이팅 넘치는 대만 청년이 있는 야채 가게가 있었는데, 당근 2개를 계산하려고 하니 청년이 갑자기 "이거 너 줄게(這給你)"라고 하는 게 아닌가. 중알못이었던 나는 '준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공짜로 준다는 건지 다른 뜻인지 이해가 안 됐다. 내가 읭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 옆에 있던 손님이 웃으면서 돈 안 내도 된다고 얘기해줬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왜(爲什麽)?"라고 물으니 청년이 이렇게 말했다.
"귀여우니까. 대만에 온 걸 환영해(你很可愛。歡迎來台灣)".
아마도 그 청년은 얼마냐고 묻는 내 어설픈 중국어를 듣고 내가 외국인임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그래서 나한테 당근을 공짜로 준 것이다. 단지 내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이미 3번의 대만 여행으로 대만 사람들이 외국인에게 친절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당근까지 공짜로 줄 정도인가 싶어 신기하면서도 이해가 잘 안 됐다.
외국인에게 친절한 건 야채 가게 청년 뿐만이 아니었다. 아침 시장에서 만난 다른 대만 사람들도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대만 사람 아닌 것 같은데 어디에서 왔냐, 공부하러 왔냐 묻기도 하고 중국어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본 한국 드라마 제목을 읊기도 하고 자기 딸이 한국에 가 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만 사람들이 보여준 관심의 정도는 저마다 달랐지만 모두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대만에 온 걸 환영해"
대만 사람들의 그 한 마디는 자괴감에 빠져있던 나를 구해주었다. 시작부터 뜻대로 되지 않는 대만 워홀에 매일 '내가 왜 여기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하고 물었던 시기였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외국인 입국을 더 엄격하게 막아야 한다는 대만 뉴스를 보며 코시국에 온 외국인으로서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아침 시장에서 직접 만난 대만 사람들은 달랐다.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고 환영한다고 말해주었다. 나를 '환영'한다니, 인사치례일지 모르는 말이어도 내겐 큰 위로가 되었다. 공짜 당근보다 대만 사람들의 말 한 마디가 더 좋았다. 그래서 더위에 쓰러질 것 같아도, 발목이 시큰거려도 매일 아침 시장에 갔다. 나를 반겨주는 대만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나에게 징메이 아침 시장은 대만에서 버티도록, 살아보도록 해준 힘이자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