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3#07
걷기 딱 좋은 날씨였던 타이베이의 12월 초 어느 날. 신베이의 잉거(鶯歌) 라오지에(老街, 옛 거리)로 나들이를 떠났다. 도자기로 유명하다는 이 거리에 간 목적은 오로지 단 하나, 고슴도치가 그려진 접시(이하 고슴 접시)를 사기 위해서였다.
잉거 라오지에에 고슴 접시를 판다는 사실을 알려준 건 한국인 동생 J였다. J는 이곳에 도자기 만들기 체험을 하러 왔다가 고슴도치 접시를 보고 내 생각이 나서 연락했다고 했었다. 다정한 J는 몇 번이나 나를 위로해 줬었다. 대만으로 오기 전, 병에 걸려 갑작스럽게 떠난 고슴도치가 보고 싶다며 울던 나를.
야자수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좁은 거리로 들어섰다. 아기자기한 돌 바닥에서부터 왠지 예술의 향기가 느껴졌다. 도자기 거리답게 도로변의 저층 건물들 대부분이 도자기 판매점이었다. 가판대에 놓여 있는 형형색색의 접시와 그릇, 잔들. 다 사고 싶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그릇 수집 욕구가 꿈틀대는 게 느껴졌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고슴 레이더의 전원을 켰다. 현혹되면 안 된다고 중얼거리면서.
과연 사막에서 고슴 바늘을 찾을 수 있을까 걱정하며 거리 초입에 있던 한 가게에 들어갔다. 빛의 속도로 두 눈알을 굴리며 고슴 탐지 레이더를 풀가동했다. 어디에 숨어 있니, 가시쟁이야. 가게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수사를 이어가던 그때, 레이더망에 목표물이 포착됐다. 머리에 빨간 사과를 꽂고 있는, 파란 귀요미 고슴이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퀄리티가 좋았다. 언젠가 다이소에서 샀던 접시에 그려져 있던 고슴도치보다 훠어얼씬 귀여웠다. 심지어 여러 마리였다. 한껏 신나서 사진을 찍으며 잠깐 고민했다. J에게 카톡해 볼까. 접시를 다시 내려놓는 몇 초 동안 무슨 말을 보낼지 생각해 봤다. 덕분에 고슴이 만났다고, 고맙다고 하면 될까?
일단 가게에서 빠져나왔다. 아무리 고슴이가 반가워도 첫 집에서 바로 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명색이 도자기 거리라면 분명 더 싸게 파는 곳이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좀 더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타이중 여행 후 약간 멀어진(것 같다고 느끼는) J에게 카톡을 보낼지 말지.
짠순이의 예감은 정확했다. 잉거 라오지에 곳곳에서 앙증맞은 고슴이들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처음에 본 것과 똑같은 접시를 더 저렴하게 파는 곳도 있었고, 똑같은 고슴이가 그려진 밥그릇과 작은 접시를 파는 곳도 있었다. 고슴도치 아이템을 사고 싶어도 없어서 못 사던 한국인에게 이곳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잉거 만세!
몇 개 사지? 일단 한 개는 아니었다. 사재기를 하고 싶지만 깨지기 쉬운 도자기의 특성상 한국으로 택배를 보내기엔 무리였다. 남은 5개월 동안 대만을 떠돌아다니면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만큼만 사야 했다. 잉거 라오지에를 몇 번 더 돌면서 고민한 끝에, 다섯 개를 샀다. 따악 다섯 개만. 세 개는 내꺼였고, 나머지 두 개는 선물용이었다.
이 귀여운 고슴 접시를 선물할 상대는 고슴도치를 키우면서 알게 된 언니였다. 언니는 대만에서 혼자 지내는 나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틈만 나면 안부 연락을 하셨다(어쩌면 우리 엄마보다 자주). 대만 생활 초창기에 길거리에서 몰카 비슷한 일을 당했다는 얘기를 했을 때도 당장 호신용으로 호루라기부터 사라고 챙겨주셨던 언니였다. 그래서 의미 있는 기념품을 선물하고 싶었던 참에 이 고슴 접시를 만났으니, 안 살 이유가 없었다. 이거야말로 내가 찾던 바로 그 기념품이었다.
가벼운 지갑과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음 목적지로 향하던 길, 라오지에 끝자락에서 내가 사랑하는 간식을 마주치고야 말았다. 부드러운 인절미에 고소한 땅콩 가루를 드음뿍 묻힌, 대만 객가(客家)족의 떡, 마쑤(麻薯)였다.
젊은 아빠와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딸이 즉석에서 고물을 묻혀 팔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미혼이지만) 엄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한 팩에 50위안(약 2천 원). 이 돈이면 고슴 그릇 하나 더 살 수 있는데, 하며 고민하다 결국 한 팩 구입했다. 고슴이 찾느라 기가 잔뜩 빨린 상태였기에 에너지 보충이 필요하기도 했다.
꼬순내가 폴폴 풍기는 떡을 받아 들고 근처 벤치에 앉았다. 빵만큼 떡을 사랑하는 떡순이는 기대를 가득 안고 한입 먹었다. 대만의 전통 떡인 마쑤. 한국 떡처럼 쫄깃하진 않아도 몰캉한 떡과 고소 구수한 땅콩 가루의 조합이 좋았다. 한국에 돌아가면 그리워질 이 맛, 역시 사 먹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 막히지 않게 떡을 한 알 한 알 천천히 먹으며 아까 하던 고민을 다시 꺼냈다. J에게 카톡을 보낼까 말까. 그리고 하나 더, 고슴 언니에게 고슴 접시 얘기를 할까 말까. 카톡 하나 보내는 게 별일 아닐 수도 있지만 괜히 조심스러웠다. 나의 그리움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동시에 조금 슬프기도 했다. 예전에는 이 정도로 소심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렇게 남의 눈치를 보게 됐을까? 그만큼 인간관계를 잘 못 해왔다는 뜻일까? 알 수 없었다.
사랑스러운 두 부녀가 떡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마지막 땅콩가루까지 입에 탈탈 털어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버스를 타러 갔다. 역시 나중에 직접 만나서 말해주는 게 더 좋겠다는, 비겁하면서도 우스운 이유를 대며.
그리운 존재를 찾으러 갔다가 오히려 그리움 안고 돌아온 잉거 라오지에 나들이는 그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