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만에 다시 찾은, 허우통과 지우펀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3#08

by 끼미


저녁 알바 안 가는 12월의 어느 일요일. 바로 오늘이었다. 지우펀(九分)에 노을 보러 가는 날!


타이베이 필수 여행 코스라는 지우펀. 나 역시 6년 전, 생애 첫 해외여행으로 혼자 타이베이에 왔을 때 갔던 곳이다.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있던 24살은 여느 관광객들처럼 빨간 등 앞에서 사진을 찍고 땅콩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비좁은 거리를 거닐었었다. 지우펀에서의 그 즐거웠던 저녁은 이후 이어진 지옥 같았던 20대 후반을 버틴 힘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끝내 모든 걸 포기하고 도망쳐온 타이베이. 이곳도 천국은 아니었다. 고독함은 더 깊어졌다. 그래서 노을 감상을 핑계 삼아 지우펀으로 추억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리웠던 그곳에서 근심 걱정 없던 24살로 돌아가 행복해지고 싶었다. 딱 반나절만이라도.


지우펀은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




허우통의 진짜 매력을 재발견하다


지우펀에 가기 전, 고양이 마을로 유명한 허우통(猴洞)부터 들렀다. 여기도 6년 전에 와본 적 있었다. 당시엔 고양이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남들이 다 간다길래 별생각 없이 왔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좀 웃긴 얘기지만, 외로워서 왔다. 온기가 그리운 나머지 사람 대신 고양이라도 궁디 팡팡하며 외로움을 달래고 싶었다.


또 하나의 차이는, 그땐 기차를 타고 왔지만 이번에는 시내버스를 탔다는 거였다. 타이베이와 신베이에서 대중교통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정기권 덕분이었다. 버스는 기차보다 시간이 더 걸리지만,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었다. 대만에서 3박 4일 놀다 떠나는 여행객이 아닌 1년이나 지내는 워홀러의 여유였다.


버스 타고 산속을 달려 도착한 허우통역. 분명 와본 곳인데도 좀 낯설었다. 그러다 마을로 이어지는 나무 터널에 들어서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24살의 내가 첫 해외여행의 설렘을 가득 안고 건넜던 그 터널이었다. 고양이를 만나기 전부터 마음이 몰랑몰랑해졌다.


귀여운 초등학생들과 함께여서 더 좋았던 허우통


나는 나이가 들었지만 허우통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고양이 몇 마리 말곤 딱히 볼 건 없는, 작고 시시한 마을. 오히려 그래서 좋았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낮잠 즐기는 고양이들, 고양이에게 간식 주며 즐거워하는 초등학생들, 꼬마 열차 타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며 신난 어른들. 특별할 것 없는 이 평화로운 풍경이 허우통의 진짜 매력이었다. 화려한 것만 좋은 줄 알았던 20대 초반엔 몰랐던, 산속 고양이 마을의 진면모가 이제야 보였다.


고양이들과 호젓한 한 시간을 보내고 다시 버스 타러 가는 길. 그늘 아래 쉬고 있던 치즈냥이를 마주쳤다. 몇 년 전 부모님 집에서 길렀던 냥이와 꼭 닮은 얼굴이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미니 얼굴을 비비며 다가왔다. 예상대로 개냥이였다. 살살 턱을 만져주니 골골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바로 이거였다. 오늘 나에게 필요했던 교감, 허우통에 오고 싶었던 이유.


땡볕 속에 서서 한참 냥이를 쓰다듬었다. 지금은 떠나간 존재를 그리워하며, 헛헛하던 마음을 채우며. 중간에 심기 불편해진 냥이가 할퀴어서 손목에 상처가 났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이 접촉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그러다 문득 지금 쉐하로 이사하기 전에 살았던 동네의 고양이도 생각났다. 밤마다 혼자 울면서 산책하고 돌아오던 나를 위로해 줬던 까만 고양이, 시아오헤이(小黑). 잘 지내고 있겠지?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돌아온 허우통은 더 이상 시시한 고양이 마을이 아니었다.


고양이 마을 허우통에서 만난 냐옹이들



지우펀에서 나를 재발견하다


지우펀으로 향하는 버스 차창 너머로 드넓은 바다가 펼쳐졌다. 드디어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그곳에 간다는 설렘으로 가득했던, 24살 때 봤던 그 풍경 그대로였다. 그러나 6년 만에 다시 찾은 지우펀은 다른 곳이 되어 있었다.


지우펀에 사람이 없었다.


물론 예상은 했었다. 2021년 12월 당시까지도 코로나 사태로 외국인 입국 금지 상태였으니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6년 전 좁은 골목을 빼곡히 채웠던 인파는 겨우 4분의 1 수준에 불과했고, 혼이 나갈 정도로 시끌벅적하던 거리는 타이베이 도심의 여느 평범한 거리처럼 조용하고 한산했다. 이렇게나 비어버린 지우펀을 보니 이곳 상인도, 대만 사람도 아니지만 코로나가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코로나의 여파로 한산했던 지우펀


낯설 정도로 달라진 지우펀. 나 또한 첫 방문 때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24살이었던 나는 이곳에서 땅콩 아이스크림 하나만 사 먹었었다. 낯선 음식에 도전하는 게 무섭기도 했거니와 중국어를 못 하니 간식 하나 사 먹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서른 살이 되어 돌아온 나는 달랐다.


대만에서 6개월을 지내며 타로볼인 '위위엔(芋圓)'의 맛을 알아버린 나는 지우펀에서 가장 유명한 위위엔을 먹기 위해 기꺼이 20분을 기다리고, 영어나 바디 랭귀지가 아닌 중국어로 주문하는 사람이 되었다. 거리를 걷다 타로로 만든 대만 전통 간식을 발견하고는 비주얼이 좀 요상해도 용기 내어 사 먹어보는 사람이 되었다. 혼자 온 사람에게 먼저 중국어로 사진 찍어주겠다고 말을 걸고, 대신 나도 찍어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대만 음식을 거부감 없이 즐기고 중국어를 구사하는 것.

어느새 당연한 걸로 여기고 있던 그 능력은 분명 6년 전에는 없던 것이었다.


바다 보며 먹은 타로볼인 위위엔(芋圓)
타로로 만든 대만 전통 간식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내 지난 날이 새롭게 보였다. 제 자리에서 빙빙 맴돌았다고 생각했던 나의 20대. 하지만 나는 멈춰 있던 것도, 후퇴했던 것도 아니었다. 도전은 결국 실패로 끝났을 지라도, 나는 여전히 자라나고 있었다. 잘 티나지는 않아도, 아주 조금씩 야금야금.


6년 만에 재회한 지우펀. 이곳에서 나는 나를 재발견했다.

24살 때처럼 마냥 희망 차진 않지만, 여전히 빛을 품고 나만의 속도로 나아가고 있는 서른 살의 나를.


대만분께 부탁해서 남긴 인증샷과 지우펀에서 바라본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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