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3#05
대만 살이 6개월째. 특별한 미션이 생겼다. 바로 ‘신베이 바다 정복하기’.
말 그대로 신베이의 모든 바닷가를 가보는 것이었다. 타이베이를 둘러싸고 대만 북동쪽 바다와 맞닿아 있는 신베이에는 멋진 해변들이 많았다. 대부분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고 반나절 여행에 딱 적절한 거리였다. 바다를 사랑하는 지리 전공자에게 신베이 바다 정복은 설레는 미션이었다.
미션의 첫 목적지는 완리(萬里)라는 동네였다. 여기는 <상견니> 촬영지를 찾다가 발견했는데, 오늘의 코스는 완리 해수욕장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걷다가 예류 지질 공원을 구경하고 <상견니> 촬영지에 들리는 것이었다.
완리의 작은 아침식사 가게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완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다 쓰러져 가는 건물들과 몇 명의 사람들만 있었다. 흡사 종말한 지구의 모습 같기도 했다. 에이, 이게 무슨 해수욕장이야.
실망해서 뒤돌아서려던 그때, 저 앞바다에 누군가 나타났다. 기다란 판때기를 들고 바닷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검은색 쫄쫄이. 설마 이 날씨에 서핑하러 온 건가? 잠시 멈춰서 염탐하기로 했다. 그리고 몇 분 뒤. 쫄쫄이맨은 하얀 파도 거품 위를 달리고 있었다. 파도를 즐기는 쫄쫄이맨을 보니 폐허 같던 해수욕장이 하와이의 금빛 해변으로 보였다. 불평했던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타고 밀려들었다.
언젠가는 서핑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해안가를 따라 계속 걸었다. 구름이 햇빛을 막아주는 덕분에 까맣게 탈 염려 없이 걷기 좋았다. 길가에 주차된 차들이 점점 늘어나더니 이윽고 항구가 나왔다. 龜吼漁港라고 적혀 있었는데, 주차장 벽에 온갖 게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걸로 보아 게로 유명한 곳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버스 정류장에도 게 그림이 있었지. 사진까지 찍어놓고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람들을 따라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완리 해수욕장과 달리 관광객들로 복작복작했다. 우리나라 어시장처럼 다양한 수산물을 팔고 있었지만, 역시나 가장 많이 보이는 건 게였다. 아까 본 그림과 똑같은 점박이 무늬의 주황색 게. 충격이었다. 세상에 빨간 등딱지 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니.
무슨 맛일까? 맛있게 게 다리를 뜯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궁금해졌다. 하지만 감히 사 먹을 수 없었다. 제일 저렴한 게가 한 근에 약 2만 5천 원. 잘은 몰라도 꽤 비싼 것 같았다. 우리나라 게도 그러니까. 아, 엄마 아빠랑 같이 왔으면 사달라고 했을 텐데! 돈도, 철도 없는 서른 살 딸내미는 '게가 게 맛이겠지 뭐' 하며 서둘러 시장에서 도망쳤다.
괜히 배만 고파진 채로 계속 걸었다. 다음 목적지는 예류 지질 공원. 구글 지도가 해안 산책길 따라 30분 정도 걸으면 된다고 알려줬다. 광활한 수평선을 보며,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하염없이 걸었다. 머릿속으로는 여기까지 와놓고선 게 한 마리도 못 사 먹는 처지를 한탄하면서. 하지만 신베이의 바다는 모험가를 위해 게보다 더 값진 선물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지도상으로 30분 걸린다던 시간은 정신 차리고 보니 한 시간으로 늘어나 있었다. 바다의 선물을 감상하느라 도저히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해안 지형이라니. 화성에 온 것 같았다. 극도로 감동받으면 숨 쉬는 걸 잊는다는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이건 무슨 암석일까, 저건 어떻게 형성된 걸까, 생각하다가 금방 때려치웠다. 그런 건 지금 할 일이 아니었다. 외계인이 깎아놓은 것 같은 암석 위에서 낚시를 하는, 간식을 먹는 사람들처럼 눈앞의 풍경을 즐기면 그뿐. 지금은 머리가 아닌 심장으로 즐길 시간이었다. 영겁의 세월이 빚어낸 대자연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예류 지질 공원으로 가기 위한 길이라 생각했던 이 해안에서 '살아 있길 잘했다'는 생각하게 될 줄은. 그냥 버스 타고 갈까 하다가 튼실한 두 다리를 믿어보기로 했던 한 시간 전의 내가 기특했다. 아무래도 이 풍경은 빠르게 달리는 버스 안에서 '멋지네' 하는 감상으로만 끝내기에는 아까웠다.
예류 지질 공원, 안 가도 되겠는데?
그래도 갔다. 나에게는 예류 지질 공원에 반드시 가야 하는 사연이 있었다.
내가 졸업한 지리교육과는 2년마다 해외 답사를 떠났다. 2학년 때 열렸던 해외 답사는 대만이 목적지였는데, 다른 동기들은 다 탔던 그 대만행 비행기에 나는 타지 못했다. 70만 원 정도였던 답사비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알바를 한 탕 더 뛰었으면 가능했겠지만 입에 풀칠할 돈 버는 것만으로도 이미 벅찬 상황이었다. 부모님앞에서는 말도 못 꺼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친구들보다 좀 늦은 첫 해외 여행지로 타이베이에 왔지만 그때에도 예류는 오지 못했다. 여전히 넉넉치 않은 대학원생에겐 중국어 못 하는 여행객이 예류에 오려면 타야 했던 택시는 사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필코 가야 했다. 그놈의 예류!
해묵은 서러움은 입장할 때부터 사라졌다. 어학당 학생증으로 학생 할인받으니 입장료가 반값이었기 때문이다. 돈 없어서 못 왔던 곳에서 할인을 받다니. 참 알 수 없는 인생이었다.
지리 전공자라면 꼭 가봐야 한다던 예류 지질 공원. 분명 멋진 풍경이었지만 마음의 파도를 일으키진 않았다. '신기하네', 그게 끝이었다. 너무 기대했던 걸까? 아니면 아까 받았던 바다의 선물 때문에 감동의 역치가 높아진 걸까? 다들 예류에서 가장 유명한 여왕 바위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줄 서 있었지만 굳이 그러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근 10년만에 드디어 와본 곳에 대한 감상 치고는 무미건조했다.
뭐, 상관없었다. “나도 예류 지질 공원에 와봤다”, 이거면 충분했다.
아아, 살 것 같았다. 아침에 샌드위치 하나 먹고선 몇 시간째 비어 있던 내 위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숯불에 정성껏 구운 뒤 알 수 없는 향신료 가루를 팍팍팍팍 뿌린 이 옥수수. 굳~이 버스 타고 찾아가서 산, 굳~이 이 해변까지 들고 온 보람이 있었다. 덕분에 한국 여행 가봤다며 신나서 말 거시던 옥수수 가게 사장님도 만났고, 미션 클리어 후 먹는 옥수수는 게만큼이나 맛있다는 걸 알았다.
게눈 감추듯 군옥수수를 해치우고 있는 이곳, 완리 해안가 투어의 최종 목적지였다. 시아리아오 해변(下寮海灘)이라는 이름의 이 바닷가는 <상견니>에서 두 주인공이 눈물의 작별 키스를 나누는 장소였다. 주인공들이 서 있었던 장소가 어디일까 가늠해 보며 옥수수 알갱이를 씹었다. 이 인증샷 하나 찍으려고 그 긴 바닷가를 삥 둘러 왔다니, 내가 봐도 이상한 미션이긴 했다.
당연히 처음부터 곧장 이리로 올 수도 있었다. 허나 그랬더라면 여기까지 오는 길에 맛봤던 그 많은 즐거움과 그 큰 감동을 느끼지 못했을 거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 미션 성공이지만 이 정도로 뿌듯하지도 않았을 테고. 역시 여행의 재미는 목적지까지 가는 길 위에 있었다.
옥수수를 다 먹고 나니 이제야 종일 고생한 두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꽉 끼는 청바지 입고 몇 시간을 내리 걸었다니. 주인 잘못 만나서 고생이 많구나.
자, 다음엔 어디 바다로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