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宜蘭), 이라니 사랑할 수밖에!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3#23

by 끼미


2022년 1월 초, 드디어 결심했다.

두 달 후 지금 살고 있는 쉐어하우스 계약이 끝나면 타이베이를 떠나 남쪽으로 가기로.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당장 떠나야 했다.

다시는 오기 어려울 대만의 북부 도시, 타이베이보다 더 사랑한 이란(宜蘭)으로.




여행을 다니다 보면 유독 정이 가는 동네를 만나게 된다. 나에겐 이란이 그랬다. 이란을 처음 알게 된 건 대만 드라마 <상견니> 덕분이었다. 내 대만 워홀의 가장 큰 목표 중 하나였던 '<상견니> 성지 순례'를 위해 드라마 촬영지를 검색하는데, 이란이라는 도시가 계속 나왔던 것이다(나중에 다시 보니 남자 주인공이 이란 출신이었다!).


처음에는 <상견니> 촬영지라고만 생각했던 이란은 방문하면 할수록 내 마음에 쏘옥 들었다. 일단 타이베이에서 버스로 한 시간이면 도착한다는 게 큰 장점이었다. 버스비도 한화 4천 원 정도로 저렴해 짠순이 워홀러도 부담 없이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당시 살고 있던 쉐어하우스에서 버스 터미널까지도 가까워 이란에서 늦은 시간까지 놀아도 걱정 없었다.


이란 쟈오시의 무료 족욕 공원들


이란에서 가장 사랑한 동네는 온천으로 유명한 쟈오시(礁溪)였다. 쟈오시! 이름부터 따뜻한 그곳에는 엄청난 장소가 있었는데, 바로 무료 족욕 공원이었다. 타이베이의 베이터우에도 공짜 족욕탕이 있긴 했지만, 쟈오시의 족욕 공원은 그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크고 수질도 더 좋았다. 심지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쟈오시 여기저기에 널려 있어 접근성도 좋았다. 명색이 대만 최고의 온천 도시다운 면모였다.


쟈오시의 넓은 아량에 반한 나는 오로지 족욕만 하러 쟈오시에 들리기도 했었다. 화롄과 타이동에서 긴 춘절 연휴를 보내고 귀환하던 날도 그랬다. 곧장 타이베이로 돌아올 수도 있었지만 중간 지점인 쟈오시에 내려 20분 남짓 족욕을 했었다. 무거운 짐과 그보다 더 묵직한 몸을 끌고. 아무리 쟈오시가(사실은 공짜 족욕이) 좋아도 이게 맞나 싶기도 했으나 뜨끈하다 못해 뜨거운 온천물에 두 다리를 담그는 순간, 회의감이 여독과 함께 녹아내렸다.


일본식 온천욕 즐긴 날


암만 짠순이라도 공짜 족욕만 즐겼던 건 아니다. 입욕비 내고 정식 온천욕을 하기도 했었다. 남쪽으로 가면 언제 또 이란에 올지 모르니 한 번은 쟈오시의 진짜 온천을 제대로 즐겨보고 싶었다. 쟈오시에는 특이하게도 일본식 온천들이 많았는데, 일본에 안 가봐서 이게 일본식인지 아닌지 평가할 순 없었지만 이거 하나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쟈오시의 온천물은 정말 최고라는 것. 평일 낮, 처음 보는 대만 아주머니 네 분과 함께 한 시간가량 쟈오시의 노천탕에 몸을 담궜던 그날, 처음 알았다. 내 피부가 이렇게나 매끈매끈 부들부들할 수 있다는 사실을!


타이베이를 떠나기 직전, 이대로 쟈오시와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에 또 한 번 그곳을 찾았었다. 아직 날이 서늘한 주말 저녁이라 그런지 쟈오시는 온천욕 하러 온 여행객들로 북적였다. 알록달록한 전구로 장식된 족욕 공원에 앉아 대만 사람들과 쟈오시의 열기를 공유했던 그 저녁, 어렸을 때 가족들과 자주 갔던 부곡 온천이 떠올라 마음이 몽글몽글했던 그 겨울. 나는 또 한 번 반해버렸다. 따뜻한 쟈오시에, 이란에.


부곡 온천 느낌 났던 주말의 쟈오시


이란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존재가 있었다. 이란을 대표하는 빵집인 이슌쉬엔(奕順軒)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슌쉬엔은 대전의 성심당 같은 곳으로, 이 집의 분홍색 쇼핑백을 들고 다니면 누구나 "저 사람 이란 갔다 왔구나!"라고 할 만큼 유명한 빵집이었다. 그러니 집에서 직접 빵을 만들어 먹을 정도로 빵수니인 내가 이란에 갈 때마다 이슌쉬엔에 들린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자석의 N극이 S극에 끌리는 것처럼.


(좌) 이슌쉬엔의 쇼핑백 / (우) 시그니처 제품인 타로 푸딩 롤케이크


이슌쉬엔에서 가장 유명한 건 부드러운 타로 푸딩이 들어간 롤케이크였다. 물론 맛있긴 했지만 역시 나를 사로잡은 건 다양한 빵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이란의 특산품인 삼성파(三星葱)를 넣은 빵들은 대파의 달달하고 향긋한 맛이 가득해 빵수니의 미뢰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이슌쉬엔의 삼성파 빵을 보며 시골에서 청양고추 농사 짓는 부모님을 둔 딸로서 많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우리 부모님이 기른 청양고추로도 이런 빵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청양고추만 파는 것보다는 더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을 텐데' 하고.


이슌쉬엔의 빵들을 먹으며 한국 돌아가면 나도 이런 빵들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대만에서 여러 빵집을 가봤지만 이렇게 저렴하면서도 맛있는 빵을 파는 곳은 이슌쉬엔이 거의 유일했다. 갈 때마다 손님들이 줄 서서 빵을 사가는 이슌쉬엔을 보며 이런 빵집을 운영하는 건 어떨까 하고 막연하게 상상했었다. 돌아 보면 대만 워홀 후 한국에 돌아와 제빵 일에 도전했던 데에는 이슌쉬엔의 영향도 있었던 듯하다. 당연히 그 당시엔 몰랐지만. 그만큼 이란의 이슌쉬엔은 나에겐 단순한 빵집 그 이상의 장소였다.


(좌) 이슌쉬엔의 매대 / (우) 가장 맛있었던 베이컨 파빵


다시 대만에서 살 기회가 생긴다면, 이란에서 살아보고 싶다.

피곤한 타이베이 생활을 버티고 새로운 미래를 그리게 해주었던,

사랑하는 드라마와 온천, 그리고 빵이 있는 나의 이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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