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4#16
여느 때처럼 즐겁지만 고독한 가오슝 탐험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 씻고 나오니 거실에 있던 집주인 쑤가 물었다.
“롱롱, 이번 주말에 친구들이랑 컨딩 갈 건데 같이 갈래?”
드디어 내게도 남들 워홀 후기 보면서 부러워했던 기회가 왔구나! 감사합니다, 주님. 아니 쑤님!
처음 보는 대만 사람들과 함께 한 1박 2일 여행. 폭삭 망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물론 여행 자체는 환상적이었다. 맛있는 해산물 요리 잔뜩 먹고, 바닷물에 발 담그고 놀고, 저녁엔 컨딩 야시장 구경하고, 국립해양생물관에선 깜찍한 펭귄들이랑 사진도 찍었다.
같이 간 사람들도 좋았다. 처음 만난 쑤 친구분들은 쑤처럼 친절했고, 계속 나를 챙겨주는 쑤 덕분에 불편함 없이 지냈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어색하게 굴던 쑤 아들 아카도 나중엔 나랑 손잡고 다니고 같이 셀카도 찍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확실히 엉망이었다. 왜냐면 내가 다 망쳐버렸으니까.
둘째 날 점심 먹을 때였다. 에그 베네딕트와 아메리카노를 먹으며 여유를 즐기는 일행들 사이에서 나는 아무것도 안 먹었다. 전날 늦은 밤에 술이랑 안주 먹고 잤더니 속이 안 좋았다. 마음도 몹시 불편했다. 분위기 맞춰서 뭐라도 시켰다가 남기면 될 걸, 돈 아낀다고 맹물만 들이키는 나 자신이 답답해서. 사실 여행 내내 그랬다. 이번엔 돈 생각하지 말고 즐기기로 다짐해놓고선 밥값 걱정은 왜 자꾸 하는지. 체할 만했다.
남들이 맛있게 먹는 동안 혼자 깨끗한 포크만 만지작거렸다. 첫날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이라도 걸어보려고 애썼지만 이젠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쑤 친구에게 프렌치토스트 맛있냐고 묻는 대신 속으로 나에게 한소리 하기 바빴다. 괜히 따라와서 분위기만 망쳤다고.
이런 속을 모르는 쑤는 아카 잘 챙겨줘서 고맙다며 선물까지 줬다. 해양생물관 기념품 샵에 팔던 작은 손거울.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난 단지 아카랑 있는 게 제일 편해서 이모 노릇 핑계 삼아 아카한테 도망쳤던 건데. 분위기 깨는 나 때문에 불편했을 쑤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가오슝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했다. 난 도대체 언제쯤 사람들이랑 대화 잘하고 돈도 잘 쓰는, 보통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평생 이렇게 못난 나로 살아야 할까.
이때는 몰랐다. 컨딩 여행이 불편했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는 것을.
진실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이번에는 쑤 부모님과 외식하는 자리에 초대받았다. 컨딩에서의 기억 때문에 망설여졌지만, 유경험자인 옆방 언니가 좋으신 분들이니 부담 안 가져도 된다고 해서 한 번 더 용기를 냈다.
언니의 말은 사실이었다. 인자한 인상의 쑤 부모님께서는 나를 마치 딸의 오랜 친구 만난 것처럼 잘 챙겨주셨다. 어색해하는 나에게 먼저 말도 걸어주시고 접시 빌 틈 없이 음식도 가져다주시며 편안하게 대해주셨다. 쑤의 다정함은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게 확실했다.
그래도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것저것 질문하고 리액션도 잘하고 싶어도 중국어가 안 되니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얻어먹는 자리라는 것도 불편함에 한몫했다. 아카에게 한국 이모 3호로 인정받긴 했지만, 일개 에어비앤비 손님일 뿐인 내가 껴도 되는 자리가 맞나 싶어 눈치 보였다.
또다시 답답해진 속은 산책하면서 풀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부슬비를 맞으며 옛날에 설탕공장이었다는 공원을 다 같이 걸었다. 빨간 벽돌 건물 앞에서 사진 찍고, 기념품 삽 구경하고, 아카랑 술래잡기하고. 시끌벅적하지만 고요히, 함께면서도 각자 산책하는 시간.
정말 좋았다. 마음이 편했다. 쑤 부모님께 무슨 질문해야 하나, 밥 얻어먹었으니 후식이라도 사야 하는 거 아닐까, 고민할 틈이 없었다. 대신 잔디밭을 걷고, 찬 공기를 들이쉬고, 뛰어다니는 아카를 보며 웃었다. 종일 시끄러웠던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드디어.
그제야 깨달았다. 오늘의 식사 자리가, 지난 컨딩 여행이 불편했던 건 내가 짠순이라서, 중국어 못하는 소심쟁이라서가 아니었다. 반가운 초대 자리에서 괴로웠던 진짜 이유는 이 머릿속 목소리 때문이었다. 제발 돈 생각 그만하고 사람들한테 질문 좀 하라며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그 목소리.
정말 바보였다. 낯선 사람들에게 말 못 걸 수도,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진 밥상 보고 돈 걱정할 수도, 얻어먹는 밥이 불편할 수도 있는 건데, 나는 왜 그런 나를 째려보면서 그러지 말라고 쏘아댔던 걸까. 그 잔소리만 없었으면, 나를 바꾸려고만 안 했으면, 훨씬 재밌고 즐겁게 밥 먹고 놀 수 있었을 텐데. 뒤늦게 후회됐다.
쑤 부모님과 헤어지고 돌아온 집. 옆방 언니까지 다 같이 거실에 둘러앉아 오늘의 썰을 풀었다. 쑤 부모님께 얻어먹기만 하고 말도 많이 못 해서 죄송했다는 나의 말에 쑤가 말했다. 맛있게 먹었으면 됐다고, 부모님이 나를 궁금해하셨는데 같이 밥 먹어서 좋아하셨다고. 그리고 옆방 언니가 웃으며 덧붙였다. “말 많이 안 해도 돼요. 나도 가면 그냥 조용히 밥만 먹고 와요. 그리고 쑤 부모님 원래 사주는 거 좋아하신대요.”
그럼 다행이라며 테이블에 놓여 있던 하얗고 동글납작한 떡을 집어 들었다. 집 오는 길에 쑤 부모님이 사주신 거였다. 역시 흑임자 앙금은 맛있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런 줄 알았으면 더 많이 먹을 걸 그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