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오슝에서 추억을 걷는 시간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4#14

by 끼미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가오슝 온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벌써 갈 데가 없었다. 매일 볼 줄 알았던 바다는 생각보다 멀었고, 대만 제2의 도시치곤 볼거리도 없었다. 쉐하 식구들에게 같이 놀아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집에만 있기엔 시간 아까운 상황.


아... 오늘은 또 어디 가지.




‘최고의 재미는 추억 팔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다시 찾아가 봤다. 7년 전에 왔던 리엔츠탄(蓮池潭), 연지담으로. 넓은 호수와 두 개의 탑이 있는 리엔츠탄은 기억 속의 그 장소이면서도 아니기도 했다. 코로나 사태로 외국인 관광객이 사라진 호숫가는 어색하리만큼 한적했다.


여전히 높은 탑을 지키고 있는 호랑이 입속에 내 얼굴을 들이밀고 셀카를 찍었다.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며 마스크에 가려진 입꼬리를 수줍게 올렸다. 다행히 방해꾼들이 많았던 당시와 달리 아주 손쉽게 호랑이와의 독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별로 신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쓸쓸해졌다. 사람 없을 때를 기다렸다가 어렵사리 인증샷 성공하고 행복해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관광객 적으면 더 좋을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기쁘기는 했다. 그리웠던 그 호수에 정말 다시 왔다는 것, 여전히 건재한 용과 호랑이와 재회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먼 곳까지 추억 여행 온 보람이 있었다. 앞으로는 리엔츠탄 하면 땀나게 더우면서도 쓸쓸했던 이 날이 떠오르겠지만, 이 또한 돌아가고 싶은 과거의 한 장면이 될 테니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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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담에서의 추억 여행


그리움은 나를 또 다른 추억의 장소로 이끌었다. 7년 전 가오슝을 여행 중이었던 어느 저녁,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길에 주홍빛 조명이 환하게 켜진 모습을 보고 감탄했던, 가오슝 시립 도서관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도서관은 아주 평범한 건물이었다. 그땐 여행 가이드북에 ‘야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나와 있어서 더 좋아 보였던 걸까? 시험 기간인 건지 일찍 하교한 남학생들을 따라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아는 중국어도, 남는 시간도 많으니 쉬운 동화책이라도 한 권 읽어볼까 하며.


탁월한 선택이었다. 도서관의 진가는 역시 안에 숨겨져 있었다. 걸어오는 길에 난 땀을 식혀주는 에어컨 바람, 읽을 수 없는 중국어들이 적힌 책들, 파란 하늘과 고층 빌딩이 보이는 넓은 유리창. 그리고 조용히 책 읽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친구 사귀기에 집착했던 워홀 초기엔 모두가 나의 친구 후보로 보였던 대만 사람들.


그들 사이에 앉아 골라온 책을 읽었다. 어느 대만인 교수가 한국어로 쓴 대만 소개 책이었다. 대만이라는 이름 대신 타이완을 사용한 그 책에는 이곳에서 일 년 동안 지내며 쌓였던 궁금증들에 대한 답이 나와 있었다. 대만 사람들은 왜 사원에서 반달 모양의 빨간 나무 조각을 던지는지, 며칠 전 옆방 언니가 먹으라고 준 룬삥(潤餅, 얇은 밀가루피 안에 야채와 고기 등을 넣고 만 것)은 대만 음식인지 아닌지...


물어볼 대만 친구가 있었으면 더 빨리 알았을 텐데, 하고 아쉬우면서도 가스 활명수를 부은 듯 뇌가 시원해졌다. 이제라도, 이렇게라도 안 게 어디인가. 후련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만석인 창가 자리엔 나처럼 마스크 낀 사람들이 저마다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앞으로 도서관에 갈 때마다 떠오를, 새로운 추억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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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추억을 만든 가오슝 시립 도서관
IMG_8110.jpg 대만인 교수가 한국어로 쓴 대만 소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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