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핑동에서 만난 익숙한 그리움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4#18

by 끼미


가오슝 한 달 살기의 셋째 주 아침, 가오슝 너머 새로운 세상으로 탐험을 떠났다. 목적지는 가오슝 바로 옆에 붙어 있으면서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대만의 22개 행정구역 중 마지막으로 남은 미지의 땅, 핑동(屏東)이었다.




핑동 여행은 언제나처럼 혼자 떠났다. 기차 타고 핑동역에서 내린 다음 다시 버스 타고 도착한 첫 번째 여행지는 대만식 족발 가게였다. 혼자 자취할 때도 월급날이면 족발 대(大) 자에 막걸리를 곁들이던 한국인으로서 핑동의 명물이라는 쭈지아오(豬脚, 족발)를 안 먹어볼 수 없었다.


대만식 족발은 우리나라의 족발과는 확실히 달랐다. 가장 큰 차이는, 족발을 주문하면 달랑 고기와 마늘 간장만 준다는 점이었다. 원래 대만에선 반찬을 따로 시키는 문화라 당연히 알고 가긴 했지만, 막상 무말랭이도 막국수도 없이 퍽퍽한 살코기만 먹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막걸리 대신 물로 목을 축이며 슴슴한 족발을 먹고 있는데, 불현듯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집에서 가족들과 족발 먹으며 답답한 집구석에서 벗어나는 날만 기다렸던, 한국 떠나기 직전의 어느 저녁. 그땐 언젠가부터 말없이 밥만 먹는 이 시간이 숨 막힌다고 생각했었는데, 대만 족발 먹으면서 가족 생각나다니. 일 년 사이에 내 마음도 조금 달라진 걸까.


핑동에서 먹은 대만식 족발


알 수 없는 마음을 안고 15분 정도 걸어 카카오 농장에 도착했다. 이대로 족발만 먹고 가기엔 아쉬워 주변 관광지를 찾아보다 발견했는데, 입장료가 무려 공짜였다.


실물로 처음 본 카카오 열매는 사진 속에서 봤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반짝거리는 광 때문인지 장난감이나 모형 같았다. 초록색이던 열매가 익으면서 노란색으로, 노란색에서 다시 빨간색과 자주색으로 변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하나의 열매에서 이렇게 다양한 색깔이 난다니, 마치 내 마음을 보는 것 같았다.


나뭇가지에 달린 형형색색의 카카오 열매들을 찍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마음이 툭 튀어나왔다. ‘나중에 세계지리 수업할 때 애들 보여줘야지.’ 도대체가 알 수 없었다. 지리라면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해놓고선 왜 자꾸 뭐만 보면 지리가 생각나는지.


교사하기 싫다면서 왜 애들한테 이 카카오 사진 보여줄 생각에 신나는 걸까? 난 진심으로 지리가 좋은 걸까, 아니면 학교에서 즐겁게 일했던 그 시절이 그리운 걸까? 지리에 대한 내 마음은 초록색인지 빨간색인지, 일 년 가까이 들여다보고 있지만 여전히 헷갈렸다.


익으면서 색깔이 달라지는 카카오 열매


머릿속이 복잡해진 채로 새로운 도시 탐험을 이어나갔다. 족발 말고는 딱히 기대하지 않았던 핑동에는 소소한 재미들이 있었다. 달콤한 전통 간식 가게와 대만에서 본 것 중 가장 깨끗한 전통 시장, 옛 일본군 숙소와 설탕공장을 개조한 공원 등을 천천히 구경하며 걷고 또 걸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가는 곳마다 족발 가게에서처럼 그리움의 감정이 느껴졌다. 쫀득한 바이탕궈(白糖粿, 하얀 설탕 꽈배기)를 먹을 땐 한국인 동생 J와 타이난에서 함께 나눠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고, 시장 가판대에 진열된 김밥을 보니 알바했던 식당의 사장님이 싸주셨던 참치김밥이 다시 먹고 싶어 졌고, 공원을 거닐며 웃는 네 명의 내 또래 여자분들에게선 나랑 같이 여행 다니는 대학교 친구들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심지어는 평소엔 잊고 지냈던 전 남친도 갑자기 생각났다. 저녁으로 따끈한 오뎅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한겨울에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꼬치 오뎅을 맛있게 먹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래서였을까. 핑동은 이날 처음 가본 거였는데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처럼 혼자였지만 평소보다 혼자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마 어디를 가든 내 기억 속 누군가가 함께 해준 덕분이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이날 나는 핑동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아니라 추억이라는 익숙한 과거를 여행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핑동에서 먹은 대만 음식들
(좌) 한국 음식 팔던 핑동 시장 / (우) 옛 일본군 숙소를 개조한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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