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4#20
전기 스쿠터 타고 해안 도로를 달리다 어느 해수욕장 앞에서 멈췄다. 4월 5일, 한국은 아직 쌀쌀할 테지만 이곳은 벌써 수영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반짝이는 해수면을 보며 빨대로 백향과(百香果, 패션프루츠) 음료를 한입 쪽 빨아먹었다. 시원하고 새콤한 이 맛. 조금 전 점심으로 초장도, 상추도 없이 오로지 간장과 흰쌀밥만으로 생선회 한 판을 먹느라 느끼했던 속이 단번에 개운해졌다.
역시 다시 오길 잘했다. 혼자 오고 싶었던, 그리웠던 이 컨딩(墾丁)에.
“컨딩에 또 간다고? 왜?”
당일치기 여행 계획을 밝히니 쑤와 옆방 언니가 물었다. 불과 열흘 전에 쑤 식구들과 다녀왔는데 혼자 또 간다니 궁금한 게 당연했다. 사실 그래서 망설였다. 혹여나 쑤가 자기와 갔던 여행이 별로였던 거라고 생각할까 봐.
하지만 그런 이유로 안 가면 후회할 게 분명했다. 이제 3일 후면 가오슝을 떠나니까.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꼭 가야 할 곳이 있어요!”
드디어 도착했다. 한국 가기 전에 꼭 오고 싶었던, 날 다시 컨딩으로 오게 만든 그곳, 대만의 최남단(最南點). 최북단과 최동단, 중심에 이어 ‘대만 정복하기’ 미션의 마지막 장소였다(최서단은 대중교통으론 접근이 어려워 뚜벅이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최남단과의 만남은 시작부터 좋았다. 구글 지도에 나와 있는 주차장에 스쿠터를 대고 있는데, 지나가던 아저씨께서 안쪽에 주차장이 또 있다며 거기가 최남단과 더 가깝다고 알려주신 거다. 나이스!
엄청난 꿀팁에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알려주신 곳에 주차하고 표지판에 ‘最南點’이라 적힌 화살표를 따라 숲길로 걸어 들어갔다. 첫 데이트 가는 듯 설레는 마음으로 5분 정도 걸으니 초록 나무 사이 저 끝에 파란 바다와 뾰족한 회색 뿔이 나타났다. 최남단이었다.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사람들이 꽤 많았다. 기껏해야 서너 명뿐이었던 최동단이나 최북단과는 분위기가 완전 딴판이었다. 아무래도 컨딩은 유명 관광지인 데다 날씨도 좋아서 그런 듯했다.
거센 바닷바람에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헬멧을 벗고 잠시 대만의 가장 남쪽 끝에 펼쳐진 바다를 응시했다. 그냥 보기엔 남쪽인지 동쪽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저 푸른 물결 끝엔 무엇이 있을까. 몸을 가누기 힘든 이 강풍을 타고 이대로 날아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수평선 너머 저 멀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였다. 온 사방이 인증 사진 남기려는 사람들로 시끌시끌했다. 마스크 위로 두 눈을 도록도록 굴리며 포토존에 침입할 타이밍을 노리고 있는데, 맞은편에 서 계시던 분들이 먼저 말을 걸어오셨다. 단체로 쫄쫄이 복장을 입은, 부모님 뻘의 자전거 동호회 분들이셨다.
“혼자 여기까지 왔어요? 대단하네!”
“한국인이라고요? 중국어 잘하네요!”
“자, 이거 먹어봐요. 대만 떡인데 맛있어요.”
“내가 사진 찍어줄게요. 휴대폰 나 주고 거기 서봐요!”
정신 차려보니 내 휴대폰은 한 아저씨가 들고 계셨고, 나는 폰 대신 떡 두 봉지를 든 채 원뿔 앞에 서 있었다. 그렇게 얼렁뚱땅, 하지만 확실하게 인증샷을 남겼다. 드디어 왔다. ‘臺灣 最南點(타이완 최남점)’!
자전거 끌고 다시 여정을 떠나시는 유쾌한 은인분들을 보내드리고 벤치에 앉아 등을 기댔다. 잠깐이었지만 혼이 쏙 빠졌다. 그래서 재밌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도 즐겁지만 역시 내가 좋아하는 여행은 이런 거였다.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과 대화하고 서로 사진도 찍어주는, 혼자이지만 함께인 그런 여행.
아주머니의 말씀대로 맛있는 대만 떡 먹고 정신 차린 뒤 다시 스쿠터에 올랐다. 7년 전 컨딩 왔을 때 못 가서 아쉬웠던 롱판 공원(龍盤 公園)을 향해 북쪽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바람이 점점 더 세차게 불어왔다. 이러다 스쿠터랑 같이 뒤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거 아닌가 싶어 무서웠다. 그래도 양손으로 스쿠터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달렸다. 갈 수 있는 곳까지 가야 했다. 이번이 생애 마지막 컨딩 여행일 지도 모르니까.
강풍과의 사투 끝에 롱판 공원에 도착했다. 도로 옆 자갈밭에 연두색 스쿠터를 주차해 두고, 초록빛 들판을 가로지르는 나무 데크 길을 따라 걸었다. 헬멧이 날아가지 않도록 끈을 꼭 붙잡고 조심조심 걷다 보니 바다가 다시 등장했다. 아까 봤던 것보다 더 넓고 더 푸르른, 대만의 남쪽 바다였다.
살면서 이런 진기한 풍경은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커다란 숟가락으로 푹 떠먹은 듯 급경사와 완경사가 공존하는 진녹색의 해안 절벽, 그 끝으로 끊임없이 밀려드는 하얀 파도, 구멍 숭숭 뚫린 진회색 암석과 화성을 연상시키는 황토색 토양. 숨 쉬는 것도 잊을 만큼 경이로운 대자연이었다.
후련했다. 대만에서 일 년 내내 느꼈던 답답함이 바닷바람에 실려 날아가는 듯했다. 쉴 새 없이 불어대는 맞바람에 두 눈을 뜨긴 어려웠지만, 대신 오랫동안 무겁게 감겨 있었던 마음의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영화 속 ET처럼 당장이라도 스쿠터 타고 저 바다 위를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가벼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진심으로 행복했다. 울면서 일 년을 버텨내고 이곳에 서 있다는 게.
진심으로 기특했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혼자 여기까지 온 스스로가.
그리고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외로움도, 진로 고민도 덜어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에 올 수 있어서.
그렇게 한참을 언덕 위에 서 있다가 스쿠터 타러 가는 길, 바닥 보며 걷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좁은 바위 구멍 사이에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앞만 보고 걸었으면 못 보고 지나쳤을, 아주 작고 앙증맞은 꽃이었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도 혼자 자란 꽃이 기특해 미소가 지어졌다. 언젠가는 나도 작지만 나만의 꽃을 피워낼 수 있기를, 헐렁해진 헬멧 끈을 꽉 조여 매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