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방 언니와의 따뜻한 하루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4#21

by 끼미


전날 다녀온 컨딩 여행의 여파로 온몸이 뻑적지근했다. 스쿠터 타느라 잔뜩 긴장했던 데다 종일 세찬 바닷바람을 맞은 탓이었다. 그래도 점심은 먹어야지 하며 나가려는데, 거실에서 마주친 옆방 이웃, 쮠쮠 언니가 물었다.


“롱롱, 밥 먹으러 가요? 나 따라가도 돼요?”

“저 삐엔땅(便當, 대만식 도시락) 먹으러 가려구요. 근데 걸어서 30분 정도 걸린대요.”

“괜찮아요. 나 살 좀 빼야 돼요.”

“하하, 그럼 같이 가요. 오예!”


진심의 ‘오예’였다. 안 그래도 언니한테 물어보려다 말았기 때문이다. 한식파인 언니가 대만 음식 일색인 삐엔땅도 좋아할까, 더운 날씨에 많이 걸어야 하는데 괜찮을까 고민하다 결국 혼자 가려던 소심쟁이에게 언니의 제안은 그야말로 깡하오(剛好). 딱 좋았다.




삐엔땅 가게까지 가는 길은 역시 험난했다. 걸을 때마다 골반은 삐거덕거리지, 인중에서 땀은 줄줄 나지, 고행이었다. 그래도 재밌었다. 걸어가는 동안 언니가 들려준 가오슝 얘기 덕분이었다. 가게에 도착한 우리는 고심 끝에 각자 메뉴를 고르고 안쪽 테이블에 앉았다. 곧이어 고기와 채소가 푸짐하게 담긴 삐엔땅이 등장했다.


“맛있게 드세요”라는 정겨운 한국어 인사를 서로에게 건네고 조용히 밥을 먹었다. 사실 조용하진 않았다. 먹는 내내 언니랑 재잘거렸으니까.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는 삐엔땅과 함께 홀라당 다 까먹었다. 하지만 편안하고 즐거웠다는 건 분명하다. 언니랑 처음으로 점심 먹으러 나갔던 그날처럼.


일주일 전, 그때도 언니가 먼저 물어봤었다. 나 밥 먹는 데 따라가도 되냐고. 솔직히 처음엔 망설였다. 지난번에 둘이서 보얼에서 데이트도 했지만 언니를 대하는 게 여전히 조금 조심스러웠다. 그랬던 내가 그날 깔깔깔 웃으며 점심을 먹었다. 이 집은 이거저거가 유명하다는 내 말에 그럼 다 시키자던, 롱롱 덕분에 이렇게 맛있는 것도 먹고 고맙다던, 밝고 따뜻한 언니 덕분이었다.


“역시 언니랑 같이 먹으니까 더 맛있어요. 삐엔땅은 맨날 혼자 먹었거든요.”

“그럼 다행이에요. 나도 오랜만에 대만 음식 먹으니까 좋네요. 롱롱이 왜 삐엔땅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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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와 함께여서 더 맛있었던 점심들


그 많던 삐엔땅을 싹 비운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거실에 앉아 수다를 이어갔다.


“롱롱, 저녁엔 뭐 할 거예요?”

“음, 고민이에요. 이제 곧 가오슝 떠나니까 야경이나 보러 갈까 싶긴 한데..”

“오, 그럼 나 야경 멋진 곳 아는데 같이 갈래요?”


이번에는 내가 언니를 따라나섰다. 언니가 말한 야경 명소는 소우산 커플 관경대(壽山 情人 觀景台)로,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커플(情人)’이라는 단어가 거슬려서 와볼 생각은 전혀 없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언니랑 같이 오다니,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거였다.


계단 너무 힘들다고 투덜대며 전망대에 도착한 순간, 깊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여길 왜 이제야 왔을까. 가오슝의 상징 85 타워와 언젠가 가본 적 있는 대관람차, 주홍빛으로 빛나는 치진 섬... 나의 반가운 가오슝이 어둠 속에서 우아하게 빛나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대도시를 넋 놓고 바라보다 옆에 있던 언니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데리고 와주셔서 진짜 감사해요,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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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와 함께 한 가오슝의 밤


감사함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전망대 구경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아이스크림도 얻어먹었다. 언니의 라이브 방송 애청자가 언니에게 기프티콘을 선물하면서 방송에 몇 번 목소리 출연했던 내 것까지 보내줬단다. 언니와 마주 앉아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니 전망대 올라갔다 오느라 쌓인 피로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내려오는 길에 쌓였던 서운함도 녹아내렸다. 사실 방금까지 기분이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전망대에서 언니가 라이브 방송하는 동안 혼자 멀뚱멀뚱 서서 기다려야 했는데, 그게 언니의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 소심쟁이는 살짝 삐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원한 아이스크림 한입에 서운함이 감사함으로 바뀌었다. 아무리 언니도 받은 거라지만 정말로 나까지 챙겨주다니, 나였으면 혼자 두 개 다 먹었을 텐데. 생각해 보면 나랑 같이 여기까지 와 준 것만으로도 이미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나라는 인간은 왜 자꾸만 더 많은 걸 바라는 걸까. 정작 나는 언니에게 제대로 뭘 사준 적도 없으면서. 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마시며 언니 몰래 반성했다.


어쩌다 보니 종일 언니와 붙어 있었다. 혼자 먹고 혼자 돌아다니던 나에게, 타인과 함께하는 게 이렇게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일깨워준 하루였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우린 왜 이제야 만났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가오슝을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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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방송 애청자 덕분에 얻어 먹은 아이스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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