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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미 Oct 07. 2024

함께라서 다행이야, 타이난 미식 여행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1#22

어학당 개강 및 한식당 알바 시작 일주일 전, J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나는 평일 저녁에, J는 주말 저녁에 같은 식당에서 알바를 하게 돼서 둘이 같이 여행을 가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우리의 대만 워홀 첫 여행지는 고민할 것도 없이 타이난(台南)으로 정했다. 나와 J 둘 다 대만 드라마 <상견니(想見你)>의 팬이라 우리들의 대만 워홀 첫 여행지가 드라마의 주요 촬영지인 타이난이 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여행 이야기에 당연히 신났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 혼자 하는 여행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누군가와 함께 떠난다는 게 두려웠다. 이 더운 여름에 같이 여행하다 나의 못난 밑바닥까지 보이면 어쩌나 걱정됐다. J와는 안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고 또 J가 너무 착해서 더 염려되기도 했다. 별 생각을 다 한다 싶을 수도 있지만 오랜 수험 생활과 우울 증세로 교우 관계가 좁아진 내게는 제법 큰 걱정이었다. 제발 착하게 잘 다녀오자, 나 자신아.




시작부터 사고 치다 ㅣ 쩐쭈나이차


사고 치고 다시 받은 쩐쭈나이차

타이베이에서 버스를 타고 3시간을 달려 타이난에 도착했다. 점심을 못 먹어서 배고팠는데 마침 버스 정류장에 쩐쭈나이차(珍珠奶茶, 버블 밀크티)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새빨간 간판에 적힌 하얀 궁서체 한자에서 맛집의 기운이 느껴졌는데, 역시나 흑당 쩐쭈나이차의 절반이 쩐쭈(펄, 버블)로 채워져 있었다.


'대만도 역시 수도를 벗어나면 인심이 후한가' 생각하며 밖으로 나왔는데, 함께 하는 여행에 너무 긴장해서인지 쩐쭈 한 알을 먹기도 전에 컵을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정류장 바닥이 까만 쩐쭈 알갱이들로 뒤덮였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대신해 J가 휴지를 받으러 가게로 들어갔는데, 친절한 직원분이 휴지와 함께 새로 만든 버블티를 주셨다. 안에서 떨어뜨린 것도 아닌데 다시 만들어 주다니, 감동이었다. 마치 자기가 쏟은 마냥 사고를 수습해 준 J는 더 감동이었다. 시작부터 엉망진창이었지만 J가 있어 다행이었다.




함께 더 다양하게 즐기는 타이난의 맛 ㅣ 소고기 요리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찜해둔 소고기 요리 가게로 갔다. J의 대만 친구가 말하길 타이난에 가면 소고기 요리를 먹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타이난의 특산품이 바로 소고기였는데, 타이난이 옛날부터 소 사육이 활발했던 지역이라 그날 도축한 신선한 소고기로 만든 요리, 특히 맑은 소고깃국인 우육탕(牛肉湯)이 아주 유명하다고 했다.


한가득 기대를 안고 찾아간 소고기 요리 가게는 기대 이상이었다. 야들야들 부드러운 소고기와 깔끔한 고깃국물은 쩐쭈나이차로 살짝 느끼한 속을 달래주었고, 소고기 볶음밥과 소고기 공심채 볶음도 그야말로 입에 쫙쫙 붙는 감칠맛을 자랑했다. 평소 “소고기보다 돼지고기!”를 외치던 나였지만(결코 돈 때문은 아니다!) 타이난의 소고기는 정말이지 차원이 달랐다. 몇 번 먹어보진 않았지만 한우보다 맛있고 심지어 가격도 비싸지 않았다. 괜히 타이난에 가면 소고기를 먹으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여러 가지 메뉴를 맛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혼자였다면 기껏해야 우육탕에 소고기 볶음만 먹었을 텐데, J가 있었기에 안 먹었으면 억울했을 볶음밥도 먹을 수 있었다. 그것도 J가 주문하자고 해준 덕분에. 그래, 함께 하는 여행의 매력이 이거였지. 이것저것 먹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함께 감탄할 수 있다는 것. 같이 오길 너무 잘했다.


타이난의 명물 소고기 요리



함께라면 쓰레기차도 두렵지 않아 ㅣ 아몬드 두부 빙수


예의상 타이난 시내 구경도 잠깐 해주고 타이난의 또 다른 명물, 아몬드 두부 빙수(杏仁豆腐冰)를 먹으러 갔다. 타이난에는 콩이 아닌 아몬드로 만든 두부가 유명하다길래 찾아보다가 J가 인스타그램에서 발견한 곳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아쉽게도 식당 안에서는 먹을 수 없고 포장만 가능해서 잠깐 고민했지만 가게 앞에 서서 먹기로 J와 합의했다. 길에 서서 빙수를 먹는다니, 한국이었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지만 대만이니까, 둘이니까 가능했다.


처음 접한 아몬드 두부 빙수는 인스타에서 본 것만큼 비주얼도 화려했지만 맛은 더 최고였다. 향긋한 꽃향기 같은 아몬드 두부의 맛과 부드러운 식감도 좋았고, 그 위에 올려진 팥과 율무, 미니 떡 등의 토핑도 아주 맛있었다. J도 나도 한 입 떠먹을 때마다 “미쳤다”를 외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정말 정말 행복한 맛이었다.


그렇게 감탄하면서 먹고 있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노래가 들려왔다.


“J야, 이 노래.........”

"언니, 이거......"


대만에 오고 난 뒤 저녁마다 지겹도록 들은 그 노래, <엘리제를 위하여>였다. 곧 쓰레기차가 등장할 것임을 알려주는 노래. 설마 했는데 역시나 저 골목에서 튀어나온 쓰레기차가 점점 다가오더니 멈춰 섰다. 바로 우리 앞에. 오, 마이, 갓.


쓰레기차 뷰를 보며 먹은 아몬드 두부 빙수


“막아 막아!!”


우리의 소중한 또우화를 지켜야 했다. 쓰레기 냄새가 들어가는 걸 두고 볼 순 없었다. 황급히 뚜껑을 덮고 쓰레기차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길바닥에 서서 또우화를 먹고 있는 것도 웃긴데 하필 코앞에 쓰레기차가 오다니. 나와 J는 쓰레기차라면 이제 지긋지긋하다며 깔깔 웃었다. ‘하필’ 며칠 전 둘이 함께 본 전시에서 쓰레기차 그림을 보며 엘리제 이야기를 했었기에 더 웃겼다. 아, 타이난에서도 끈질기게 우리를 찾아오는 엘리제여. 그래도 다행이었다. 함께 하니 다소 불쾌(?)한 경험도 웃음으로 넘길 수 있어서.




인생의 맛을 함께 나눈다는 것 ㅣ 야시장의 굴전


타이난 여행 첫날의 마지막 일정은 화원 야시장(花園夜市)에 가는 것이었다. 대만 하면 역시 야시장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게 우리 둘의 의견이었다.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아 도착한 야시장에는 대만 사람들로 가득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없으니 한결 돌아다니기 편하고 쾌적했다. 대만은 왜 이렇게 코로나 방역을 빡세게 하나 원망했으면서 이건 또 좋았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온갖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한 야시장을 돌아다니다 어느 가게 앞에서 멈췄다. 대만 야시장의 트레이드 마크, 굴전(蚵仔煎)을 파는 곳이었다. 실시간으로 굴전을 굽는 모습에 홀린 듯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메뉴판이 붙어 있는 빨간 플라스틱 테이블이 마치 우리나라의 포장마차 같았다. 비록 초록병 쐬주와 우동은 없지만 대신 굴전을 주문하고 잠시 기다리니 드디어 굴전이 나왔다.


화원 야시장에서 먹은 인생 굴전


"와, 너무 맛있는데...?"

"그쵸!! 저번에 징메이에서 먹은 거랑 비교가 안 돼요!!"


그야말로 '인생 굴전'이었다. 대만 여행 올 때마다 굴전을 많이 먹어봤지만 이렇게 맛있는 굴전은 처음이었다. 특히 바삭바삭한 '꼬다리' 부분이 맛있다며 경상도 출신의 두 여자는 굴전 한 판을 뚝딱 해치웠다. 역시 대만은 굴전의 나라다.


갓 구워 뜨끈한 굴전과 대조적으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굴전의 맛을 더해줬다. 시끌벅적한 사람들 소리와 가게 상인들의 호객 소리, 그토록 그리웠던 '진짜' 대만 야시장이었다. 코로나로 다 죽어버린 타이베이의 야시장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대만만의 이 분위기.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는지 훗날 J도 이날 먹은 굴전과 야시장 이야기를 종종 꺼냈다. 타이베이의 유명한 가게에서 먹어도 결코 '타이난 그 굴전' 맛이 안 난다고, 타이베이 어느 야시장에 가도 '타이난 그 야시장' 느낌이 안 난다고.





누군가와 함께 떠나는 여행은 혼자 가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사고를 함께 수습해 줄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는 것, 여러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것, 당황스러운 상황을 함께 웃으며 넘길 수 있다는 것. 그중에서도 가장 큰 매력은 함께 미소 지을 추억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혼자 하는 여행에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함께 하는 여행만의 소중함을 J와 떠난 타이난 여행에서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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