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1#23
어딘지 아파 보이는 주황빛 하늘을 보며 치킨 버거를 먹으면서 생각했다.
'내 성격은 왜 이 모양일까...'
8월 말의 타이난은 사람을 쪄 죽일 것 같은 찜통 속이었지만 둘째날도 부지런히 타이난을 돌아다녔다. 숙소 근처에서 우육탕으로 아침을 먹은 나와 J는 공자묘에서 초록색 우정 팔찌도 맞추고 아몬드 두부도 먹고 안핑수옥(安平樹屋)도 구경했다. 타이난에만 있다는 흰색 꽈배기를 먹고 너무 맛있어서 한 봉지를 또 사 먹은 우리는 타이난의 예술 거리라는 선농지에(神農街)에 들러 ‘에이, 아무것도 없네’ 하고 시시해 하며 버스를 탔다. 그리고 문제가 시작됐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드라마 <상견니>의 핵심 촬영지인 ‘32 레코드(唱片行)’였다. 촬영지의 진짜 이름은 ‘小半樓’라는 카페 겸 예술 공간이었다. 구글에서 찾은 주소는 타이난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오로지 그거 하나 보러 가야 하는 외곽이었는데, 그래도 타이난 왔으니 32 레코드는 가야 하지 않겠냐며 먼 여정길에 올랐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40여 분을 달려 도착한 곳에는 32 레코드가 없었다. 여기가 아닌가 싶어 이 골목, 저 골목 다 훑어보고 서툰 중국어로 상인들에게 물어도 봤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느낌이 싸했다. 구글 맵을 켜서 ‘小半樓’의 최신 리뷰를 다시 찬찬히 읽어보다가 절망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지금 우리가 와 있는 곳은 ‘小半樓’는 맞지만 32 레코드는 아니었다. 우리는 ‘32 레코드’를 찍은 곳이 ‘小半樓’인 걸 알기에 구글 맵에서 ‘小半樓’를 검색해서 이곳에 왔는데, <상견니>를 찍은 후에 ‘小半樓’는 다른 곳(우리가 지금 있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즉, 우리가 찾는 32 레코드를 가려면 구글 맵에 나오는 ‘小半樓’의 현재 주소가 아니라 예전 주소를 찾아가야 했다. 낭패였다.
상황을 파악한 우리는 타이난 시내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벌써 4시였다. 더위와 허탕에 몸과 마음이 지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버스에 타기 전 그래서 어떻게 할 건지 서로에게 물어봤지만 정하지 못했다. 사실 속으로는 ‘진짜’ 32 레코드를 찾아가고 싶었다. 나는 이 날만을 기다리며 코로나를 버틴 상친놈(상견니에 미친 놈)이었다. 이상한 골목에서 헤맬 때 32 레코드의 올바른 주소도 찾아둔 상태였으니 뭘 하든 일단 32 레코드부터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다른 데를 가고 싶었다.
반면에 J는 저녁부터 먹으러 가고 싶다고 했다. 정확한 메뉴가 뭐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일본 음식 파는 식당이었는데, ‘타이난에서는 타이난 음식을 먹어야지!’이라는 고집을 가진 나에게는 그다지 끌리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문제는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여행 전부터 걱정했던 일이 벌어졌다. 어줍잖게 남을 배려한다고 하면서 자기 고집 부리고 우물쭈물대느라 남의 속을 답답하게 하는, 그런 나의 밑바닥이 드러나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역시 내가 문제다.
“언니, 그럼 각자 놀다가 나중에 터미널에서 만날까요?”
보다 못한 J가 먼저 말을 꺼냈다. 충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동안 '같이' 했던 여행은 늘 24시간 똑같은 스케쥴로 움직였기에 같이 왔지만 따로 여행을 한다는 건 상상하지도 못했었다. J의 말이 맞았다. 각자 하고 싶은 게 다른 우리에게 꾸역꾸역 같이 다니는 것보다 갈라서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타이난 시내로 돌아와 헤어졌다. J는 먹고 싶다던 일본 음식점으로, 나는 진짜 32 레코드가 있는 곳으로 떠났다. 혼자가 되니 마음이 편하기도 불편하기도 했다. 32 레코드로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그냥 J를 따라갔었어야 했나, 지금이라도 연락해볼까. 아니다, J도 지금은 혼자 있고 싶을 지도 모른다. 착한 J야말로 나랑 다니면서 고집 센 언니 맞춰주느라 힘들었을 거다.
더 이상 흘릴 땀도 없는 몸을 끌고 32 레코드가 있다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두 갈래의 작은 길이 만나는 지점에 하늘색 건물이 있었다. 그렇게 오고 싶었던, 나를 대만으로 오게 한 ‘32 레코드’. 구글 맵에서 본 대로 원래 있던 ‘小半樓’가 이사를 간 뒤 방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안에 들어가볼 수는 없었지만 유리창 너머로 몇몇 흔적들만 남아 있는 내부를 들여다봤다.
몰골은 추레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32 레코드 앞에서 셀카를 찍었다. 처음에는 그냥 찍다가 갑자기 드라마 속 시그니처 포즈가 생각났다. 검지와 중지만 편 채 눈을 가리는 포즈. 왼손을 들어 포즈를 취하고 휴대폰 화면 속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가보고 싶었던 곳을 찾아갔다. 타이난 여행 기념품으로 사갈 다양한 맛의 아몬드 두부를 사고, 역사가 오래된 일본식 전병(煎餅) 집에서 미소된장 전병과 계란 전병도 샀다. 양손 가득 기념품을 들고 저녁으로 먹을 햄버거를 사러 갔다. 타이난에 왔으니 대만의 남쪽 지방에만 있는 '딴딴 버거(丹丹 漢堡)'를 먹어보고 싶었다.
가게 안에서 먹을까 하다가 혹여나 버스 시간 놓칠까봐 치킨 버거 세트를 사들고 터미널 바로 앞의 공원으로 갔다. 어둑어둑해지는 공원에서 치킨 버거와 고구마 튀김을 펼쳐두고 먹기 시작했다. 콜라가 없어서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목이 매였지만 물로 건조한 버거 빵을 적셔가며 먹었다.
우리나라의 맘스터치 같은 곳이라더니 정말 맘스터치 싸이버거 맛이랑 비슷했다. 한숨이 나왔다. 역시 J를 따라갔었어야 했나. 다 먹고 멍 때리다 보니 J에게 터미널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J에게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며 터미널로 건너갔다.
"언니, 이거 봐요!"
다시 만난 J는 나를 관광 안내소로 데려가더니 뭔가를 보여줬다. <상견니>의 세 주인공 얼굴이 있는 포스터가 인쇄되어 있는 A4 사이즈의 빳빳한 종이였다. 위 아래로 종이를 펼쳐보니 타이난 지도와 함께 <상견니> 촬영지들의 위치가 적혀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곳에는 32 레코드의 위치도 정확하게 나와 있었다. 허탕 치고 다시 찾아갔던, 제대로 된 주소였다.
"아니 올 때도 버스 타고 왔는데 왜 이거 못 봤지?"
"그러니까요! 여기 다 있는데 괜히 고생했어요."
J의 '고생'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데려간 나 때문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머리로는 '32 레코드 가야 하는데'라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이기적인가. 이건 '상친놈'이 아니라 그냥 '미친 놈'이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려는 미친 놈.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이 더위에 나만 믿고 따라갔다 고생만 한 J는 아무리 착해도 내가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래도 착한 J는 자기도 저녁 먹고 나서 32 레코드에 갔었다며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 속 J는 다른 시간, 같은 곳에 있었던 나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었다.
“J야, 미안해. 내가 제대로 안 알아보고 데리고 가서...”
“아니에요, 언니. 괜찮아요. 지도가 이상한 거에요, 지도가.”
J에게 아까 산 아몬드 두부와 전병을 건넸다. 이 아몬드 두부 되게 핫하다더라, 이 전병집 엄청 오래된 집이더라 라고 말하며. 이걸로 J의 고생이 없었던 일로 되진 않겠지만 이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다. 제 멋대로인 미친 언니라서 미안하다고, 늘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