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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화려하지 않은 할리우드를 떠나다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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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이영숙 Sep 06. 2024

숫자를 좋아하는 어른들

5번 프리웨이를 탔다. 토요일 오후여서 그런지 퍽 한가하여 여유롭게 운전할 수 있어 참 좋았다. 이리저리 고개를 기웃거리며 프리웨이 주위를 살피다가 아련한 생각이 떠올랐다.

처음 미국에 와서 세리토스 쪽에 살았다. 매일 LA를 오가며 5번을 타고 힘들었던 그때. 유난히도 밀리는 5번 프리웨이. 4시 이후면 엄청나게 밀려 집에서 혼자 기다릴 아이 생각에 차 안에서 발을 동동 거렸다. 때론 가다 서다를 계속하며 운전하던 중 하늘 나는 비행기만 봐도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고파 가슴 아릿한 그리움에 밀리는 차안에서 혼자 눈물 짓던 날도 있었다. 이런 저런 일들이 향수(鄕愁)되어 내 몸을 감싸며 다시 가슴 한 켠이 아릿해 왔다. 문득 한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전광판.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나에게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는 숫자만 가득히 적혀있는 그 전광판. 앞에 $ 표시가 있는 것을 보면 돈을 의미하는 것은 알겠는데 어쩌자는 건지. 그 돈을 주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필요하다는 말인지. 그때 매일 다니면서 그 전광판을 볼 때마다 과연 무슨 의미일까 궁금해 하던 나에게 떠오른 ‘숫자’에 대해 기억이 있었다.

어릴 때 읽은 책 중에 쌩땍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좋아했었다. 어린 왕자는 내 가슴에 남는 말을 참 많이 했다. 그 때 아직은 어른이 안 된 때였지만, 나중에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어린이의 마음으로 살리라 생각하며 감명깊이 읽었던 그 책을 떠올렸다. 특히 어린왕자의 말 한 마디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이상해, 어른들은 숫자를 참 좋아해.”라고 한 어린 왕자의 그 말. 어린 왕자는 말하기를 아이들은 친구를 소개받을 때 “그 친구는 어떤 장난을 좋아하니? 목소리는 어떻지? 그 아이는 우표 수집을 하니?”라고 묻는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 사람 나이가 몇이야? 월수입은 얼마지? 형제는 몇 명인데?”라고 숫자로 이야기한다. “정말 멋진 집을 보았어.”라고 할 때. 아이들은 “그 집 정원에 나비와 새가 날아오니? 창가에 제라늄이 피어있는 붉은 벽돌집이니?”라고 말한다. 어른들의 대답은, “그래? 몇 에이커야? 얼마짜리 집이야?”라고 숫자부터 따진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 어른들은 모든 것이 숫자로 통한다. 세상에 숫자가 없었으면 어른들의 대화는 어떻게 변해갔을까. 대화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을까? 숫자가 아니면 통하지 않는 대화를 다른 어떤 것으로 대치하며 지냈을까? 처음 숫자가 이 세상에 생긴 것은 대화를 위함이 분명 아니었을 탠대도.

집이 몇 에이커냐에 따라 그 주인의 위엄도 함께 넓어지고, 차가 얼마나 크고 비싼 것이냐에 따라 그 차를 탄 사람의 인격도 함께 커지는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다닐 때도 그 일이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가? 그 일을 함으로 내가 삶에 얼마나 보람을 느낄 수 있는가. 남에게는 얼마나 도움을 줄 수가 있는가를 따지기 전에 ‘그 일을 하면 얼마를 벌수가 있지?’부터 생각한다.

교회 성도들도 숫자로 이야기하기는 마찬가지다. 누가 어느 교회에 다닌다고 말을 하면 첫 번째 묻는 말이 “그 교회는 성도들이 몇 명이나 됩니까?” 라든가, “교회 일 년 예산은 얼마지요?”라는 질문을 해야 그 다음의 대화로 연결 된다. “그 교회 영성이 어떻습니까?” 혹은, “성도들은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고 살아갑니까?” “아픈 성도들이 위로받기에 좋은 곳입니까?” 등의 말로 좋은 교회, 성공한 교회로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도대체 숫자를 떠나서는 거의 대화가 되지 않는다. 모든 어른들은 숫자로 이야기가 통한다.

쌩떽쥐베리의 ‘어린왕자’를 읽고 난 후 나는 숫자를 좋아하는 그러한 ‘어른’이 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리라고 굳게 결심하고 노력했건만 나도 이제 어른이(?)되었나보다. 숫자를 좋아하는 그러한 ‘어른’이. 언제부턴가 숫자가 자꾸 내 머리에 들어온다.

친구가 새 옷을 사 입고 왔을 때에도 그 옷이 얼마나 친구에게 잘 어울리는가를 말해주고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 된다. 일단 의식적으로“예쁘다.”라고 말 한 후에는 언제나‘저 옷 얼마짜리일까?’라는 생각이 뒤를 따라 나온다. 누군가의 예쁜 액세서리를 봤을 때도 그 아름다움에, 섬세한 조각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샀느냐, 얼마짜리냐 하는 것이 더 깊은 관심거리가 된 숫자에 얼룩진 어른이 돼버렸다. 나의 삶의 기준이 숫자로 얼룩지고 있다. 쌩떽쥐베리의 ‘어린왕자’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숫자로 이야기하는 어른.

이제 좀 변해야겠다. 하늘에 떠 있는 한 점 구름에 넋을 빼앗길 수 있는 아이. 맑은 냇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웃을 수 있고, 물에 떠 있는 꽃잎 따라 하염없이 물길 따라 흘러가는 어린이고 싶다. 공깃돌 다섯 개면 하루가 지루하지 않을 어린아이로. 노랑나비 쫓아 하루를 다 보내고도 숫자를 손꼽으며 몇 시간을 허비했다고 후회하지 않는 그런 어린이였으면 좋겠다.

아름다움은 오직 아름다움으로만 이야기하고, 좋은 집이란 몇 에이커가 되든 상관없이 그저 작은 정원에 나비나 새가 날아 올만큼 꽃이 피어있으면 훌륭한 집이라 말할 수 있는 아이처럼. 편안한 친구는 나이도 수입도 관계치 않고 서로의 취미를 이해하고 함께 관심 가져주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 아플 때 힘들 때 같이 기도해주는 사람이면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그런 가식 없는 마음의 소유자이고 싶다.

나 자신도 모르게 변해가는 내 모습. 어린이날을 맞아 오늘 하루만이라도 숫자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푸른 하늘을 날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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